- 스키아파렐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로즈베리는 2027 S/S 컬렉션 ‘Going Clear'를 준비하며 불필요한 소음을 걷어내고 브랜드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 ‘세퍼레이트(separates)’에 주목한 이번 컬렉션은 오트 쿠튀르의 실루엣과 정교한 디테일을 톱과 스커트, 팬츠 등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는 옷으로 풀어냈습니다.
-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유서 깊은 스키아프 재킷과 초현실적인 모티프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되살리며, 하우스의 유산을 오늘날의 옷과 액세서리로 자연스럽게 연결했습니다.
하우스의 역사를 머금은 채 한결 자유로워진 스키아파렐리의 봄여름.




불필요한 소음을 걷어낸 자리
늘 강렬한 옷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온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과감한 실루엣 너머, 소음을 하나씩 걷어냈을 때 마지막까지 남는 스키아파렐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지난 10월 1일(현지 시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공개된 2027 S/S 컬렉션 ‘고잉 클리어(Going Clear)’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쏟아내는 쇼장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구불구불하게 놓였는데요. 늦은 밤 오래된 파리의 클럽에 들어선 듯한 공간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Cry Me a River’가 흐르며 낯설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쇼의 첫 장면을 열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로즈베리(Daniel Roseberry)는 이번 시즌 패션을 통해 얻는 지위와 타인의 인정, 업계의 소문, SNS와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올여름 SNS 앱을 지우고 미국 동부로 떠난 그는, 파리로 돌아온 뒤에도 뉴욕 마라톤을 준비하며 달리기에 몰두했는데요. 빠르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패션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난 경험은 결국 ‘스키아파렐리다운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바라보게 했습니다.




스키아파렐리가 말하는 매일 입는 쿠튀르
다니엘 로즈베리가 이번 시즌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이 쿠튀르와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 오히려 쿠튀르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만 골라 손이 자주 가는 일상적인 옷으로 바꾸는 것이 더욱 스키아파렐리답다는 건데요. 그래서 이번 시즌 로즈베리가 내세운 것은 세퍼레이트(separates)였습니다. 말 그대로 톱, 스커트, 팬츠처럼 각각 따로 입을 수 있는 옷에 주목하며 한 벌의 드레스 안에 담겨 있던 형태와 디테일을 여러 아이템으로 나눈 것이죠. 화이트, 블랙, 부드러운 버터 컬러를 중심으로 색을 좁힌 것도 다양한 피스들을 손쉽게 조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옷에도 쿠튀르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선보인 벨라 하디드(Bella Hadid)의 레이스 드레스 룩도 그중 하나였는데요. 당시 제인 버킨(Jane Birkin)의 크로셰 드레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완성했던 레이스를 이번에는 마이크로 쇼츠와 드레스, 보디수트로 확장했습니다. 잔잔한 무늬를 촘촘하게 채우기보다 꽃과 곡선을 크게 그려 넣어 레이스 자체의 존재감을 살렸죠. 여기에 그의 직전 쿠튀르 컬렉션 ‘심연(The Abyss)’ 속 입체적인 형태를 잡은 고혹적인 코르셋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요. 나무껍질처럼 울퉁불퉁한 결을 살린 얇은 비스코스 니트와 천에 작은 구멍을 뚫고 가장자리를 자수로 감싸 무늬를 만드는 브로더리 앙글레즈 기법까지 더해지며 쿠튀르의 정교한 기술이 훨씬 가벼운 옷으로 옮겨왔습니다.






다시 입는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헤리티지
이번 시즌에는 스키아파렐리 하우스의 상징도 새롭게 돌아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가 1930년대에 즐겨 선보였던 스키아프 재킷이 있었는데요. 그는 마치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듯 재킷 앞면에 자수와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파격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장 콕토(Jean Cocteau)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같은 예술가들과의 교류 역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요.
그리고 이번 시즌 로즈베리는 이 유서 깊은 시그니처 재킷을 여덟 가지 모습으로 다시 불러냈습니다. 킹피셔 블루, 모스 그린, 살몬 핑크 같은 아카이브 컬러를 입힌 채로요. 여기에 채소 모티프의 자수와 과감한 슬릿, 도드라진 숄더 라인 등 위트 있는 디테일까지 더해졌죠. 그의 장난기는 액세서리로도 이어졌는데요. 입술 모양의 브라스 장식을 그대로 손잡이로 만든 백부터 엘사의 슈즈를 닮은 니트 앵클 부츠와 높이를 낮춘 토템 힐까지. 여기에 돌고래, 돼지, 고양이, 거미 등의 동물들을 형상화한 주얼리를 선보이며 쇼는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열쇠구멍과 입술처럼 하우스의 오랜 상징 역시 신발 위와 가방 자수, 칼라 뒤쪽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숨어들었죠. 브랜드의 유산을 곳곳에 남겨두는 동시에 오늘날의 감각으로 능숙하게 풀어낸 다니엘 로즈베리. 이보다 더 스키아파렐리다운 답이 또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