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커플

 

동거의 나쁜 예

L과 나의 동거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본가가 지방이라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나와 달리 L은 집이 서울이었는데도 하루, 이틀 집에 안 들어가고 우리 집에서 자더니 그게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됐다. 처음에는 모든 게 재밌기만 했다. 꼭 신혼부부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을 ‘커플템’으로 사고 함께 장을 봐서 레시피를 찾아 음식을 해 먹는 게. 하지만 집에 오면 나를 제일 먼저 반기는 L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바지가 어느 순간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잘 못 하는 나로서는 그냥 내가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합의하에 같이 살기로 했으면 역할 분담을 했을 테지만 그게 아니니까 ‘내 집이니 당연히 내가 치워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장을 보러 가도 L은 절대 지갑을 열지 않았다.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버거워져서 계속 이렇게 지낼 거면 앞으로 반씩 분담하자고 했더니 “네 집인데 당연히 네가 사야지. 솔직히 내가 주말에 집에 가거나 하면 이 집에 더 오래 있는 사람이 너잖아”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소한 스트레스가 겹겹이 쌓이던 차에 변기에 소변 자국이 심하게 나 있는 걸 보는 순간 폭발했다. L의 모든 짐을 모아 바깥에 내놓고 보니 그 양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더 ‘현타’가 왔다. 젓가락 하나만 물고 남의 생활에 편승하던 L, 지금도 그러고 있을까? K( 약사, 29세)

 

사랑보다 진한

동거 5년 차, 함께 보낸 여름이 다섯 번인데 올여름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겨울쯤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나와 이사할 계획이라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었다. 최악의 폭염을 경고하는 뉴스에도 두어 달만 버티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시했는데, 아뿔싸 지옥문이 열렸다. 징후는 둘 다 귀가가 조금씩 늦어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시원한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열리는 불구덩이가 다음 날 아침까지 지속된다고 생각해보라. 늦은 밤 집에서 만나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샤워하고 물을 닦지 않은 채 그대로 나와 침대가 아닌 바닥에 누워 더위와 사투를 시작했다. 주말에는 이 패턴이 서너 차례 반복된다. 새벽까지 뜬눈으로 잠을 설치다 문득 눈을 뜨면 알몸으로 선풍기 앞에 양반다리를 한 채 멍하니 앉아 있거나 냉동실 문을 열고 힘없이 서 있는 여자친구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썼다. 냉동실에 있던 걸 전부 버리고 편의점에서 돌얼음을 사다 가득 채운 다음 서로의 몸에 뿌린 후 잠을 청하기도 했고, 내 작업실에 캠핑 침대를 두고 잔 적도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밤이 오는 게 무서울 지경이 됐을 때 우리는 도망치기로 했다. 이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어디로든. 더 넓은 집으로 가기 위해 들던 적금을 깬 후 여자친구는 아끼던 월차를 썼고, 나 역시 일주일 정도 휴업한 후 둘이 남쪽 지방을 돌며 여행을 했다. 오래 동거하다 보니 집 밖에서 만나는 건 친구들과 술 마실 때 정도였던 여자친구를 낯선 곳에서 보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나 싶었다. 돌아오니 서울의 더위는 한풀 꺾여 있었다.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을 만큼 시원해졌을 때 오랜만에 서로 꼭 끌어안고 누웠다. 이등병 때 느꼈던 전우애 같은 묘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았다. M( 타투이스트, 35세)

 

동거도 사이즈가 맞아야

각자 자취를 하던 우리는 결혼을 결정하자마자 비용 절감을 핑계로 살림을 합쳤다. 따로 나가던 월세를 절약해 신혼여행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가자는 계획이었다. S의 집이 내 집보다 커서 나는 그 집에서 함께 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S는 ‘조금이라도 월세가 더 적게 나가는 네 집에서 사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S가 혼자만 좋으려고 그렇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잠시의 불편을 참으면 더 좋은 것이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투 룸 같은 원룸인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동거를 시작하고 며칠간 야근이 많았던 나는 드디어 동거 후 처음으로 S와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게 되자 모처럼 기분 좀 내고 싶었다. 집 앞 지하철 역에서 S를 만나 팔짱을 끼며 근처 새로 생긴 식당으로 가자고 했더니 S는 정색을 하며 “외식을 왜 해, 집에 먹을 게 천지던데”라고 말했다. “냉동실에 음식이 꽉 차 있던데 그것만 파먹어도 저녁 값 꽤 굳겠다.” 일단 ‘파먹는다’는 표현에 놀랐고 ‘밥값 굳는다’는 식의 어투를 S와 만나는 반년 동안 들어본 적 없어서 충격이었다. S는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며 들어가서 맛있는 것 만들어주겠다고 나를 달랬다. 이튿날엔 퇴근 후 극장에서 영화나 보고 들어가자고 했더니 “그 영화 VOD로 떴던데 1만원이더라. 둘이 극장 가면 거의 2만원인데 집에서 같이 오붓하게 보자”는 답이 돌아왔다. 동거 전에 항상 하던 주말 데이트는 기다렸다는 듯 강제 종료됐다. “결혼해도 맨날 밖으로 싸돌아다닐 거야? 이렇게 집에서 데이트하는 법도 좀 익혀야지”라는 게 S의 논리였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는 둘이라 더 많아진 빨랫감으로 빨랫대를 접을 새가 없고, 슈퍼싱글 침대에 성인 둘이 누워 극장 동시 상영 중인 영화를 보며 어제 끓인 김치찌개를 먹는 삶. 불현듯 결혼 후라고 지금과 얼마나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며 아찔했다. 며칠 뒤 S와 차분히 앉아 대화를 했다. 그날의 대화를 요약 하면 나는 ‘현재를 포기하면서까지 미래를 위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고, S는 나와 정반대였다. ‘아껴야 잘 산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기에 우리는 끝을 맺는 게 서로를 위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얼마 전 S의 결혼 소식을 들었는데 상대는 ‘회사원으로 1억 모으기’유의 책을 쓴 저자라고.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N(마케팅 회사 과장, 3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