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에다히로카즈 영화

“이번 작품에서는 외국 스태프와 일했지만 영화인들과 교류하면서 눈에 보이는, 즉 국가와 국경, 인종보다 더 크고 풍부한 것이 영화라는 공동체 안에 있다는 걸 실감한다. 국가성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척 행복하다.”

배우인 엄마 파비안느(카트린 드뇌브)가 회고록을 내자 뉴욕에 살고 있는 그의 딸 뤼미에르(줄리엣 비노쉬)가 찾아오며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시작한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오래 봐왔다고 믿는 두 사람은 회고록에 담긴 진실과 거짓을 놓고 팽팽히 맞선다. 연기로 일가를 이룬 중년의 여성 배우와 오랜 시간 그를 사랑하고 증오해온 딸이 서로를 이해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모국어로 연출하지 않은 첫 해외 올 로케이션 작품이지만 숏 중간중간 풍경을 쓰는 방식,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의 톤, 관계의 변화와 진전,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조, 여백과 침묵, 그사이 흐르는 음악까지 일관되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스럽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다 가볍고 경쾌해졌다는 것. 그러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팬이라면 어쩔 도리 없이 사랑할 영화다. 일본에서는 10월 중 개봉하고, 올해 연말 우리나라에도 소개될 예정이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하며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지난 5년 동안 매년 영화를 찍었고, 그 외의 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면 대본을 고치고, 책을 읽어도 영화를 위한 책밖에 읽지 않는다”는 감독과 마주 앉아 또다시 영화 이야기를 했다.

모국어로 연출하지 않은 첫 작품이자 첫 해외 올 로케이션 작품이다. 언어와 장소가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영화는 누가 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색이 선명하다. 그런 점에서 제작 초반에는 소통이 큰 과제로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들과 언어로 직접 소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편지를 써서 내 생각을 글로 남겨 배우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촬영 현장에서도 쓰는 방식인데, 이 작품에서는 의식적으로 편지의 분량을 늘려 소통하려고 했다. 배우, 스태프와 공통 언어가 없는 경우 생각을 글로 전하는 것은 언어를 넘어 생각을 공유하고 다음 단계를 맞춰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영화는 언어와 국경, 문화적차이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영화의 핵심 인물이라 할 배우 카트린 드뇌브에게는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나? 영화사 속에서 빛나고, 지금도 여전히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우의 매력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점에서 그녀가 우리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편지가 필요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는 현장이 전부인 배우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뛰어난 순발력으로 최고의 것을 찾아내 표현하는, 홀로 집에 앉아서는 도저히 영화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낼 수 없는 배우에 가깝다.

그런 그와는 다른 소통 방식이 필요했을 것 같다. 맞다. 이런 이유로 카트린 드뇌브와 나는 가능한 한 현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아침 그녀의 대기실로 찾아가서 그날 촬영에 대해 대본을 보면서 이야기도 하고. 대신 매일매일 그날의 스케줄을 전달하면서 오늘의 날씨나 파리의 가을 하늘 등을 표현한 시를 적어 보냈는데 굉장히 좋아했다. 마음에 들어서 잘라 보관했다고 하더라.

이번 영화는 오직 모녀의 유대감과 감정 교류에 집중한다. 모녀 관계의 다층적이고 복잡다단한 면을 섬세하게 포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했나? 변호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변호사에 대해 공부한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변호사가 어떤 삶을 사는지 조사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눈앞에 두 여성 배우가 있고, 두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연출자로서 두 사람이 꽤 긴 여행을 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카트린드뇌브, 줄리엣 비노쉬와 모녀 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물론 그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해석하는 등장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드시 모녀여야 했던 이유가 있나? 가족영화를 만들자, 혹은 이번에는 엄마와 딸에 관한 영화를 만들자 하기보다 한 사람의 여성 배우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다. 그런 가운데 배우로서 실패한 딸을 대비시키며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영화에는 모녀 관계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한다. 둘의 상황과 입장이 역전되기도 하고, 여러 상황에서 모녀 관계를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들며 그동안 알지 못한 모녀 관계의 특수성을 발견했나? 질문의 취지와 조금 다른 답일 수 있는데, 영화 후반부에 엄마가 딸에게 ‘어제 몇 번 했냐, 잘하냐’는 등 섹스에 관한 농담을 하지 않나. 이런 상황은 일본에서는 없지 않을까, 프랑스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배우가 꽤 즐겁고 자연스럽게 그 대사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새로웠다. 아, 프랑스에서 엄마와 딸은 서로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열려 있구나 싶었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앞서 대사에서 느껴지듯 이전 작품에 비해 유머의 빈도가 높고, 전체적으로 유쾌하다. 감독 역시 영화를 보고 난 뒤 느낌이 밝았으면 좋겠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간 특별히 배드 엔딩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주로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주제의 작품들이 이어졌기 때문에 조금 템포가 빠른, 단조보다는 장조의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극 초반 파비안느가 어떤 감독의 영화에 대해 평가하며 ‘시적인 면이 없다’고 비난한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가? 많은 사람이 당신의 영화를 두고 ‘시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시적인 요소는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맞다. 그 장면은 파비안느의 입을 빌려 내 생각을 이야기한 거다. 시적인 것…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해야할까. 영화의 힘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어제와 똑같은 하늘이 오늘은 다르게 보인다는 점 아닐까. 어제와는 다른 하늘로 보이게 만든다는 것. 뤼미에르 안에서 엄마라는 존재와 그 의미가 변화하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영화가 지닌 가장 작고도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시 역시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본다. 컵이 컵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은 맥락으로 ‘(영화를 통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며 감독에게 다가온 가장 빛나는 시간은 언제였나? 영화 후반부에 뤼미에르가 자신의 어린 딸을 앞세워 할머니에게 어떤 말을 하도록 시키는 장면이 있다. 원래는 시나리오에 없던 장면이다. 촬영이 절반가량 진행됐을 때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문득이 장면을 추가했다. 이 장면을 통해 ‘아, 뤼미에르는 고향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은 성장해서 뉴욕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가장 인상 깊다.

왜 여전히 영화를 만드느냐는 질문은 이제 당신에게 왜 살고 있느냐는 질문처럼 다가올 것 같다. 늘 새롭게 어려운 질문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외국 스태프와 일했지만 영화인들과 교류하면서 눈에 보이는, 즉 국가와 국경, 인종보다 더 크고 풍부한 것이 영화라는 공동체 안에 있다는 걸 실감한다. 국가성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척 행복하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전히 영화를 만들며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번 영화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채워지거나 비워낸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언어나, 일본을 떠나는 문제 등 여러 불안한 점이 있었다. 이런 문제는 여러 방도로 준비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디서든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채울 수 있었다. 반대로 비워낸 것… 비워낸 것이라기 보다 놓친 것이 있다면 반년 정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딸아이가 반년만큼 빠르게 성장했다는 거다.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거울 앞에서 스스로 머리를 빗는 모습을 봤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아이는 컸지만 나는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면대 위에는 여드름 약이 놓여 있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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