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그가 헤어드라이어를 사자며 나를 어느 가전제품 매장에 데리고 갔을 때를 우리 동거의 시작점이라 여기기로 했다. 나는 오랫동안 긴 머리를 유지한 사람이라 헤어드라이어는 삶의 필수품이다. 그는 그렇게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영리한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의 귀가를 지연시켰다.

그것은 곧 콘택트 렌즈 케이스를 놓고 가라는 권유로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옷장 속 서랍 한 칸을 비워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아마 그것이 내가 처음 받은 선물이리라. 고작 나무 서랍 한 칸 때문에 묘하게 고마운 순간이 있었고, 그 후 우리의 연애는 다른 챕터로 넘어갔다. 아마도 그는 내 까다로운 관상을 보고, 시내의 호텔로 유인하기 어려운 타입이라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문제의 서랍이 있던 그 집은 나를 염두에 두고 고른 장소였고, 그곳이 내 생활 반경과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듯 나에게 동거는 한 사람을 아직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일을 마친 후 같이 저녁과 밤을 보내고, 낮의 일과를 처리하고 다시 함께 저녁을 맞는 하루가 반복될 때. 트렁크에 짐이 쌓여가고 칫솔과 로션이 어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어느 날부터 각자 집에 돌아가지 않은 채 기꺼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또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면 아마도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낭만을 위협하는 순간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그는 생각보다 옷을 잘 챙겨 입지 않고, 예상보다 쉽게 토라지며, 화해하기는 어렵고, 분리수거는 여전히 성가시다. 마찬가지로 나는 아침과 저녁 외모의 일관성이 부족하고, 필요 이상으로 일에 매몰되며, 마음과 달리 다정한 표현이 아주 서툴 것이다. 이런 걸림돌을 만났을 때도 결국 하루의 끝에는 같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더 도망갈 곳은 없고, 모든 게 내 잘못인 것만 같으며, 여차하면 그가 아끼는 치약을 싸 들고 쉽게 예전 집으로 돌아가버릴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힘들게 쌓은 우주가 생각보다 연약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는 나의 부모가, 형제가, 십년지기 친구가 아니기에 나를 조건 없는 애정으로 너그럽게 봐주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쉽게 눈치채고는 눈감아 주진 않을 것이다. 분명하다.

 

동거

함께 사는 연애가 하향 곡선을 그린다면 그 이유는 다만 꾸준히 성실하게 서로를 유혹하는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섹슈얼한 매력은 뭐가 됐든 처음과 같을 수 없다. 그럴 때 둘 중 하나라도 마음이 꾸준히 습하고 도전적이라면 행운이다. 둘만의 사적인 유머가 있다면 더 쉬워진다. 어색하게 도망가는 연인을 돌려세우고, 잘 보이려 애쓰고, 그 모습이 어쩐지 서로 웃기고 귀여워 보일 수만 있다면.

누군가는 나를 동거라는 분야의 전문가로 여기지만, 아쉽게도 이 영역에 전문가는 없다. 지난 몇 번의 연애를 하는 동안 나는 거의 연인과 함께 살았는데, 과정은 각기 다르게 행복했고 헤어짐은 매번 똑같이 아팠다. 다만 분명한 건, 시작은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서랍을 내어주는 선택, 콘택트 렌즈 케이스를 인질로 삼고 헤어드라이어를 사주는 선택. 이런 일련의 선택으로 우리는 어색한 질문을 뛰어넘어 함께 사는 연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사귈래요?” 같은 질문만큼,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질문은 어쩐지 어색하니까.

헤어지는 방법의 묘수는 아쉽게도 전혀 없다. 몇 번을 겪었다고 해서 능숙하게 처리될 리 없다. 그럼에도 자꾸만 장치를 만들고 덫을 놓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과정을 반복한다 해도, 기쁨과 슬픔이 어김없이 순환한다 해도, 내 안의 모든 낙관성이 이번만큼은 예외일 거라고 외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았다. 그럴 땐 다시 서랍을 비워주는 편이 낫다. K(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