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김환기

1913년 4월 3일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진도군 기좌면 읍동 출생,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한국의 산천과 하늘, 달과 구름, 백자와 전통무늬 등 매우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점점 추상화시켜 점, 선, 면으로 이를 나타내는 전면점화를 그렸다.

김환기 생애

1931년 19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로 밀항하여 긴조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년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4월에 다시 도쿄의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였고, 전위를 표방하는 미술단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한다. 후지타 츠구하루의 주도하에 길진섭, 김병기와 함께 활동하였다. 여기서 같이 다니던 길진섭, 다시카미 다케나, 간노 유이코, 후나코시 미에코와 함께 ‘백만회’를 조직했다. 도쿄의 화랑에서 단체전 4번, 개인전 1번을 하고 1937년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 미술대 교수를 역임한 김환기는 1947년 유영국·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라는 미술단체를 결성, 52년에는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5 ~ 44살 동안 5번의 전시회를 하다가,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프랑스 파리와 니스 그리고 벨기에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이후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1959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다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했다.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뉴욕으로 건너가 11년간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뉴욕에 정착한다. 여기서 김환기의 대표작인 전면점화가 탄생하였다. 그러던 중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그 유명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을 출품하고 대상을 받기도 했다.
김환기는 평소 작품을 그릴때 꼿꼿하게 선 채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목과 허리 통증이 심했다. 결국, 1974년 7월 13일에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다음날 새벽 병상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뇌사 상태에 빠진 후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 7월 25일 뉴욕주 포트체스터(port chester)에 있는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오전 9시 40분에 사망했다. 평소에 즐겨 다니던 뉴욕주 발할라(Vahalla) 산마루의 켄시코(Kensico) 묘지에 안장되었다.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우고 서예가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향년 61세이다.
김환기의 공적을 기려 1978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김환기 작품 세계

작품 경향은 크게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하는 수업 시대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하여 볼 때,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등에서 시도된 기계의 찬미 등에서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
광복 이후부터 부산 피난 시절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적 소재의 발견으로 일관되었다. 달과 산과 구름과 학 그리고 나목(裸木)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경향이었다.
약 3년간의 파리 시대는 이러한 주제가 더욱 요약되고 함축된 이른바 양식의 심화기로 볼 수 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워 버린다든지, 극히 단순한 선으로 요약된 산과 몇 그루의 나목과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파리에서 돌아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서울 시대는 파리 시대의 지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성이 보다 단순해지면서 상징적 요소가 더욱 짙게 내포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이라든지, 곡선의 중첩으로 상징되는 산 그리고 몇 개의 사각 점획들로 대변되는 풍경 가운데의 점경 등이 상징적이면서 풍부한 공간 해석으로 이끌어 갔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 때까지의 약 10년간의 뉴욕 시대는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하여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묘는 추상 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도 없어졌다. 그 대신 수묵(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있다. 그는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구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대 화가라 할 수 있다.

김환기 관련 기사

Go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