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커플

속으로만 말하는 여자

룸메이트 M의 화법에 익숙해지기까지 나도 시간이 좀 걸렸다. 글쎄, 그걸 화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M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입을 꾹 닫아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것이 불편한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하는 M의 성격 때문이라는 걸 이해하고 나니 함께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M의 연애를 지켜보는 건 다른 문제였다. M은 대학교 때부터 2년째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고, 둘의 소통 방식은 대충 이랬다. 한번은 M이 고등학교를 다닌 담양으로 둘이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간 김에 아직 그곳에 살고 있는 M의 친구도 만나기로 했단다. 하지만 친구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만나지 못하게 됐다. M은 그 이야기를 듣고 혼자 오래 고민하더니 남자친구에게 ‘고모할머니가 위독하셔서 담양 여행은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가 시간이 안 나서 못 만난다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했더니 “솔직하게 말했다가 오빠가 나 친구 없다고 의심하면 어떡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며칠 전 M은 남자친구와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고 나가더니 한참 후 펑펑 울면서 들어왔다. 그가 이별 통보를 한 것 같다는 것. 잘은 모르지만 남자친구도 M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했다는 거냐 말았다는 거냐 재차 물으니 M은 “오빠가 헤어지자는 식으로 이야기하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도 안 하고 그냥 듣고만 왔다”며 엉엉 울었다. 아쉬운 게 있으면 지금이라도 연락을 하라고 달래봤지만 M은 “오빠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다”며 직접 연락하는 대신 새벽마다 교회에 기도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빠가 마음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단다. 몇 날 며칠 기도하는 것보다 카톡 한 통이 더 빠를 거란 생각은 못 해봤니? M을 옆에서 지켜보다간 내 복장이 터질 것 같다. S( 대학원생, 26세)

 

 

효도 여행인 줄

나보다 열 살 많은 L은 시시때때로 자신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자신은 일단 운전을 못하고, 극장에서는 맨 뒷자리에 앉아야 하며, 고기 같은 것은 구울 줄 모른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그걸 전부 내가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처음으로 함께 맞는 L의 생일을 좀 색다르게 보내고 싶었던 나는 부산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L은 업무차 부산에 간 적은 있지만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라며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이 함께 타는 기차는 불편하다고 해서 나는 부산까지 내리 여섯 시간을 운전했다. 첫날의 계획은 시내 구경을 한 후 간단히 조개구이를 먹고 호텔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사 방에서 생일 축하 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시내 구경을 마친 우리는 청사포로 향하는 길에 택시 운전사에게 추천받은 조개구이집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직원이 조개를 구워주는 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장갑을 끼고 조개를 구워야 했을 것이다. 탁, 탁, 조개 벌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침이 고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조개를 굽던 직원이 “초장 넣어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게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인 듯했다. 노랗게 익어가는 조개에 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초장을 섞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나는 대뜸 “네”라고 대답했다. 직원은 망설임 없이 초장을 넣고 능숙하게 잘 구운 조갯살과 섞기 시작했다. 직원이 사라지고 나서야 L의 어두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L은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한다. 나도 알고 있었지만 성인 남자에게 초장이 매운 음식일 수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긴 했지만 소주와 조개는 잘만 들어갔다. L은 초장을 부은 이후 단 한 점의 조개도 먹지 않았다.

싸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들어간 우리는 이후 새벽이 될 때까지 다섯 시간 가까이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기 생일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는지 한참을 말없이 있던 L이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나 싶어서 적당히 호응해주려 앞에 앉았는데 가만히 초를 꽂던 L이 갑자기 말했다. “초장 왜 넣었어?” 이 일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서 이 말이 맴도는 걸 보면 강렬하긴 했던 모양이다. M(약사, 32세)

 

 

다 내놔

A와 나는 5년을 만났다. 20대의 절반을 함께 보낸 셈인데 콩깍지 끼어 마냥 좋았던 적도, 크고 작게 싸운 적도 있지만 끝내 맞출 수 없었던 부분은 하나하나 말하기에도 창피한 A의 쪼잔함이다. 작년부터 정이 떨어졌지만 지금까지 만난 시간 때문에 헤어지자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며칠 전 사소한 짜증에서 싸움이 시작됐고, 그때를 틈타 나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A는 기다렸다는 듯 “나니까 너처럼 못생긴 여자를 만나줬다”라며 인신공격을 시전하더니,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미친 듯이 퍼부은 다음 바로 휴대폰에서 나를 차단해버렸다.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몸소 확인시켜줄 줄이야. 이틀 후 A는 그새 내 아이디 차단을 풀었는지 ‘잘할 테니 다시 만나보자’라며 메시지를 보내왔고, 급기야 회사 앞까지 찾아와 매달리기 시작했다. 헤어지기로 한 이후 그 마음이 굳어지기만 한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단호하게 마음을 바꿀 의지가 없음을 밝혔다. 그러고 며칠 뒤. A에게서 ‘그동안 너를 만나면서 쓴 돈이 5천만원은 되는 것 같다. 헤어질 거면 5천만원을 내놔라’라는 메시지 가 왔다. 그만큼 줄 돈도, 줄 생각도 없었지만 새삼스레 따져보니 5년을 만나며 그에게 받은 생일 선물은 딱 하나 ‘MC*’ 가방이었다. 내가 저 생일날 준 L 브랜드 지갑은 생각도 안 났나 보다. 그 돈을 주지 않으면 소송을 할 거라나? 며칠 후 놀랍게도 A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을 땐 A의 그 쪼잔함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배신감에 치가 다 떨린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다”라고 하는데 확 쌍욕을 해주려다 말았다. 이제라도 헤어진 게 다행이지만 5년간 좋아했던 사람의 뒷모습이 이 지경이라니 많이 씁쓸하다. K( 영화 마케터, 2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