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이 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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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SANDA

록산다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는 브랜드’다. 쇼장에 들어서자 이번에도 그녀의 주특기인 화려한 컬러가 런웨이를 물들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비주얼 아티스트 라나 베굼 (Rana Begum)과 함께 낚시 그물로 만든 거대한 조형물을 공중에 띄워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쇼가 시작되자 예상한 대로 컬러풀한 드레스와 배색이 조화로운 룩이 연이어 등장했다. 통 넓은 바지, 펑퍼짐한 드레스 등 편안하고 여유로운 실루엣에도 우아함이 넘쳐흘렀다. 이번 컬렉션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 건 쇼 중간에 블랙과 화이트 룩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늘 컬러풀한 색채를 고집하는 록산다 컬렉션에서는 일반적인 경우와 반대로 블랙과 화이트가 포인트 요소로 작용하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컬렉션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모노톤과 높은 채도를 오가는 컬러 팔레트, 견고한 가죽부터 예민한 실크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소재, 우아한 드레스 위에 트렌치코트를 더하거나 팬츠와 드레스를 겹쳐 입는 과감한 레이어드까지. 자유자재로 강약 조절을 하며 쉴 새 없이 록산다 식 플레이를 맘껏 펼친 쇼였다.

MOLLY GODDARD

쇼장에 들어서자 주변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테이블마다 와인이 놓여 있었다. 이런 배려 덕분에 치열한 자리 싸움이나 긴장감 없이 모두가 두런두런 대화하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쇼가 시작됐다. 몰리 고다드는 이번 컬렉션을 구상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1990년대의 기억을 떠올렸다. 공주처럼 꾸미고 싶었던 어린 몰리의 동심에서 비롯된 룩은 다 큰 성인 여성들의 마음까지 동하게 했다. 몰리 고다드 컬렉션은 두 가지 상반된 매력이 공존한다. 시그니처인 튈 드레스는 한편으로는 공주 옷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키치한 느낌도 공존한다. 몰리 고다드의 재치 있는 레이어링 때문일 터. 이번에도 그녀의 스타일링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튈 드레스에 패턴 니트를 레이어링하거나 팬츠 위에 풍성한 드레스를 덧입어 현실감을 높였다. 특히 린지 윅슨이 오프닝 무대에 입고 나온 태피터 소재의 프릴 드레스는 기존 튈보다 좀 더 편하게 입을 수 있을 듯했다. 또한 이 옷들이 소녀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듯 처음으로 남성복을 선보인 점도 인상 깊었다.

MM6 MAISON MARGIELA

초대받은 장소에는 관객이 앉을 자리도, 버젓한 런웨이도 없었다. 그저 안내되는 동선을 따라 큰 창고 같은 실내에 들어가면 모델이 눈앞에서 워킹하거나 옷을 전시한 공간, 분주한 백스테이지까지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한, 그야말로 런웨이 없는 런웨이가 펼쳐졌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룩을 놓칠까 봐 초조할 일 없는 쇼라니, 이 얼마나 기발한 아이디어인가! 모델 코앞까지 다가서서 자세히 본 새 시즌 룩은 과연 MM6다웠다. 9월에 출시할 노스페이스와 협업한 라인이 처음 공개됐고 그 반응은 뜨거웠다. 기능성 아우터라는 인식이 강하던 노스페이스 다운재킷을 브랜드 특유의 감각으로 재해석했는데, 특히 네온 오렌지 컬러 팬츠나 지브라 패턴 톱에 실루엣을 변형한 패딩 아우터를 걸친 룩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MM6의 넘버링 로고를 더한 노스페이스 아우터는 공개되자마자 SNS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발매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것을 예감케 했다.

Margaret Howell

한결같이 정적이고 담백한 마가렛 호웰의 컬렉션을 보고 있으면 실험적이고 펑키한 분위기와 또 다른 런던을 보는 듯 감회가 새롭다. 게다가 환경보호를 위해 적게 사고, 잘 골라서 오래 입자는 주장이 거세지는 업계 상황을 고려할 때, 마가렛 호웰의 가치는 더욱 높이 평가된다. 심플한 스타일을 강조하듯 쇼의 시작을 알린 오프닝 룩은 바스락거리는 코튼 소재의 깨끗한 흰색 셔츠 드레스였고, 이어 베이식한 검정 오버사이즈 블레이저가 등장했다. 그 뒤를 이은 중성적인 코트와 군더더기 없는 셔츠, 바지 밑단을 투박하게 접어 올린 스타일링까지 마가렛 호웰의 옷은 어떤 화려한 기교도 필요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그 자체로 강렬했다. 여기에 변덕스러운 날씨를 고려한 듯 모든 룩에 닥터마틴 스타일의 워커를 매치한 것은 컬렉션을 더욱 런던스러워 보이도록 하는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혹자는 매 시즌 똑같고 특징 없는 옷이라 말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렛 호웰은 간결한 아이템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한다. 꾸미지 않은 듯 스타일리시한 마가렛 호웰의 옷이 잘 어울린다면 그만한 축복이 또 있을까.

RICHARD QUINN

‘갓 세이브 더 퀸(God Save the Quinn)’. 영국의 패션 저널리스트 사라 무어가 쓴 쇼 노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영국의 총애를 받는 디자이너 리처드 퀸 쇼는 이제 런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거대 하우스 브랜드의 컬렉션과 견줄 만한 압도적 규모의 쇼장은 이 브랜드가 얼마나 급속도로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였고, 생화로 뒤덮은 무대는 보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했다. 그의 시그니처인 화려한 드레스는 이번 시즌 한층 더 과감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이는 룩과 다채로운 패턴은 역시 ‘런던 쿠튀르’로 평가받는 리처드 퀸의 작품다웠다. 라텍스나 깃털 장식도 컬렉션에 생기를 불어넣은 화룡점정 요소. 매 시즌 비슷비슷한 주제로 평이하게 흘러가는 쇼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볼 때마다 이토록 놀라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을! 떠오르는 신예 디자이너에서 맥시멀리즘의 대가가 된 그에게 이번에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SIMONE ROCHA

시몬 로샤 컬렉션은 언뜻 보기에는 늘 분위기가 비슷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번 새로운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이번 시즌 시몬 로샤는 아일랜드 작가 존 밀링턴 싱의 <바다로 가는 기사들 (Riders to the Sea)>에서 컬렉션의 모티프를 발견했다. 작은 어촌에 사는 어부들의 삶을 자신만의 패션 언어로 그려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네트 백은 어부들의 그물을, 굵게 짠 케이블 니트는 파도를 표현했다고 한다. 샤 소재와 리본, 비즈와 크리스털을 더해 완성한 룩은 한눈에 보기에도 사랑스러웠고, 엉킨 그물을 표현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레이어드한 스타일링 역시 인상적이었다. 한편 진주를 장식한 액세서리들과 슈즈가 결혼을 앞둔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의식했는지 주얼리에 심혈을 기울인 듯했다. 언제나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하는 시몬 로샤는 이번에도 팬들을 만족시킬 컬렉션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CHRISTOPHER KANE

늘 성적인 내용을 컬렉션 주제로 삼는 크리스토퍼 케인의 이번 시즌 테마는 삼각형이다. 이 삼각형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디자이너는 첫째 야릇한 여성의 레이스 팬티, 둘째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연의 삼각관계, 마지막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신의 눈이라고 설명했다. 속뜻은 이렇게 자극적이지만 디자이너는 심오한 메시지를 절대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삼각형을 기하학적 패턴으로 정렬하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컷아웃하고 오버사이즈 니트웨어나 셔츠, 드레스에 삼각형 가죽 패널을 더하는 등 우회적이고 세련된 방법으로 표현할 뿐이다. 특히 플리츠스커트와 레이스 톱이 어우러진 룩은 화보 촬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이번 쇼 역시 늘 그렇듯 에로틱한 주제를 거부감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하려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ERDEM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1930년대에 활동한 사진가 세실 비턴의 작품과 그의 드라마 같은 인생에 푹 빠졌다. 특히 세실 비튼이 알루미늄포일을 이용해 공간을 꾸미고 여동생을 분장시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만들던 신인 시절의 작품에서 영감 받아 ‘The Age of Silver’를 주제로 쇼를 이끌었다. 당대를 풍미한 사진가의 아티스틱하고 글래머러스한 작품에 경의를 표하듯 메탈릭 룩이 대부분이었고, 그의 사진 중 체크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떠오르는 체크 룩도 등장했다. 또 묵직한 실크 원단, 가죽 소재, 진주나 거대한 깃털 장식을 사용해 쇼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한편 평소 꽃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디자이너답게 이번 시즌에도 자신의 주특기인 플라워 장식을 선보였는데, 번쩍이는 은빛과 플라워 패턴이 만나 기품 넘치는 여인을 표현한 룩은 가히 압권이었다. 사진가 세실 비턴의 예술 감각이 에르뎀 쇼에 진하게 묻어나는 컬렉션이었다.

TOMMY HILFIGER

최근 몇 시즌 동안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컬렉션을 선보인 타미 힐피거가 이번엔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2020 F/W 쇼를 선보일 장소로 낙점했다. 포뮬러 원(F1) 스타인 카레이서 루이스 해밀턴과 협업해 완성한 타미 × 루이스 컬렉션은 성조기를 활용한 룩부터 네온 컬러 트레이닝복까지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아메리칸 스타일에 스트리트 무드를 결합한 젊고 경쾌한 룩으로 표현됐다. 쇼가 시작해 끝날 때까지 클럽에 와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온몸이 들썩이는 공연도 관객을 압도했다. 모두가 즐기는 신나는 컬렉션 자체로도 환호를 받았지만, 옷의 디자인이나 뜨거운 분위기 외에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기농 면이나 재활용 원단 등 전체 컬렉션의 70퍼센트 이상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점, 그리고 나이와 인종의 경계를 없앤다는 철학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모델을 캐스팅하고 모든 체형을 커버할 수 있도록 사이즈를 확장하는 등 시대에 발맞춰 계속 변화하는 점은 글로벌 브랜드로서 타미 힐피거의 가치를 높이는 멋진 행보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