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하는 이레

세상을 구하는 이레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2020년, 우리가 주목한 얼굴들.

니트톱 에이치앤앰(H&M), 스커트 듀이듀이(Dewedewe).

미래의 어느 날,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생긴 좀비들에게 점령당한 한국은 세계에서 고립된다. 디스토피아의 한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여자아이, ‘준이’는 강인한 엄마와 어리지만 제 몫을 다하는 동생과 힘을 합쳐 좀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빠져나온다. 영화 <반도>에서 배우 이레는 어른을 구하는 아이, 준이를 연기했다. “<반도>는 제게 선물 같은 영화예요. 머릿속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때 찾아온 작품이거든요. 배우로서 제 미래에 큰 힘을 주었어요. 처음에는 준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더 잘해내고 싶은 마음에 진짜 열심히 연기했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그러다 감독님이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한 마디가 큰 울림이 되었어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느낌이었죠. 그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마음을 바꾸니 현장이 더 즐거워지더라고요.” 이레가 만들고 싶었던 준이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아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며 만난 준이는 폐허의 땅에서 스스로 운전을 터득할 만큼 기백이 있고 남다른 아이였지만,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다가온 준이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아이였다. 준이에게 디스토피아에서 만난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일을 겪어낸 서사를 채워 넣었다. 설렘으로 작품을 만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카 체이싱을 연기로 익히고 준이의 서사를 채우며 마친 <반도>가 상영까지 끝낸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장의 풍경은 모든 배우들과 함께 식사하던 시간이다. “좀비를 연기한 배우들을 비롯해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늘 함께 식사했어요. 식구라는 단어가 함께 밥을 먹는 데서 나온 거잖아요. 정말 식구 같은 팀과 함께한 촬영장이었어요. 운전을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식구처럼 늘 함께한 그분들의 조언 덕에 카 체이싱 연기도 할 수 있었죠.” 가족은 <반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여자와 아이, 노인은 새로운 가족이 되고 그들이 연대한 덕분에 미래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함께 있었는데 왜 지옥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짧은 문장이지만 준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 아이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이레의 시작은 <소원>이었다. <소원>에서 상처투성이 시간 속에서 가족과 함께 위로와 희망을 찾던 여덟 살의 이레는 <반도>에서 가족을 구해냈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 아닌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게감이 없다고 할 순 없어요. 앞으로 더 잘해낼 수 있을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죠. 이런 고민이 제 내공을 탄탄하게 다져주고 있어요. 무엇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배우가 된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현장의 스태프, 배우 선배님들과 함께 이야기와 캐릭터를 그려가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게 어쩔 줄 모를만큼 재미있을 때도 있어요.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어요. 이유 없이 설레고 이유 없이 좋아요. ‘그냥’.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엄청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연기가 좋고, 그냥 시나리오를 받으면 설레요.” 앞으로 이레의 필모그래피가 어떤 작품으로 채워질지는 가늠할 수 없다.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드라마나 영화를 하고 싶어요. 설령 작품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작품으로 만들어낼 능력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고요.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힘든 현실에서 잠시나마 도피하는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잖아요. 행복하고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드는 배우이고 싶어요.” 이런 마음은 앞으로 가고 싶은 삶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 “페이스를 잃지 않을 만큼 밑바탕을 단단하게 다지고 싶어요.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는 자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불안하지 않기 위해 지금 열심히 쌓아놔야죠. 선을 지키며 타인을 존중하고 그로 인해 존중받는 사람,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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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마주하며 – 이학주

다른 삶을 마주하며 – 이학주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2020년, 우리가 주목한 얼굴들.

블랙 티셔츠와 팬츠 모두 오프화이트(Off white™).

“연기를 남들보다 좀 늦게 시작했어요. 군대에 다녀온 후 연극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그즈음 한 동기 형이 영화를 같이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솔직히 그때는 좀 귀찮았죠. 학교에서 친구 과제를 같이 해주는 기분이었거든요. 영화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불성실한 배우였죠. 그런데 막상 촬영하다 보니 묘한 재미가 있는 거예요. 잠깐이지만 다른 삶을 체험한 듯한, 마치 전혀 모르는 이의 감정 속에 빠져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그 인물의 진짜 감정보다 훨씬 얕았겠지만요. 그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계속 영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2년, 취직과 연기의 기로에서 얼떨결에 참여한 영화 <밥덩이>는 그렇게 배우 이학주의 시작이 되었다. 배우가 되기 위한 오랜 준비 과정이나 불타는 열망은 없었지만, 처음 출연한 영화에서 느낀 묘한 재미에 빠져 8년째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연기하면서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순간은 맡은 캐릭터의 삶을 온전히 경험했다고 느낄 때다.

“혹자의 말을 빌리면 저는 종지 같은 배우예요.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나라면 이렇게 안 할 것 같아’ 하는 생각에 부딪힐 때가 많거든요. 이해의 범위가 좁았어요. 그래서 늘 더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대본을 볼 때도 ‘나라면’ 하는 생각을 배제하고 글로 적혀 있지 않은 서사를 찾으려고 하고요. 대본에 적혀 있는 말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감정이 쌓여 있는지 반추해보는 거죠. 이를테면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인규’가 애인 ‘현서’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인규는 어떤 감정을 쌓아온 인물인지 추적하면서 연기했어요. 특히 인규는 더욱 제 생각을 대입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사견이 들어가는 순간 전혀 납득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요. 최대한 인규로서 인규를 바라보려고 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8년 동안 맡은 무수한 인물 중 가장 실제 자신과 거리가 멀고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인물 인규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의 ‘준근’처럼 명확한 의지로 움직이기보다 휩쓸리듯 우유부단하게 살아온 그에게 <부부의 세계> 속 인규는 지나치게 서슴 없고 직선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무려 ‘지선우(김희애)’, 이‘ 태오(박해준)’와 날 선 대립을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그는 두려움이 앞섰다.

“대본을 보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김희애 선배님과 박해준 선배님을 마주할 때마다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인물인데,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두려웠어요. 그럼에도 인규가 될 수 있었던 건 선배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촬영하는 내내 뭔가 사사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별히 이건 이렇게 하라고 얘기하신 적은 없지만, 같이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저로서는 배우는 게 많았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 이름까지 알릴 수 있었으니 <부부의 세계>는 제게 특별한 작품일 수밖에 없어요. 배우로서 이렇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받아보니까 되게 좋네요, 하하.”

<부부의 세계>의 인규에 이어 <야식남녀>의 ‘태완’, 그리고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의 준근까지. 그는 올해를 가장 많은 삶을 탐구한 해이자 이학주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더없이 좋은 최고의 시기라고 자평했다. 그렇지만 처음이 그러했듯 다음을 위한 명확한 계획이나 노선은 없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더 많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일 뿐이다. “또 다른 인생 작품을 만나고 싶다거나 특정 연기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은 없어요. 그냥 계속 작품을 하는 것, 가능하면 최대한 많은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프리랜서다 보니 늘 고용 불안에
시달리거든요.(웃음) 그 작품들에 저만의 감수성이 담긴다면 조금 더 좋을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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