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애나와 훈

감독 김태용

누군가에게 <만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을 것이다. 달콤한 고백의 언어, 따뜻한 포옹 같은 건 여기에 없다. 오히려 단정한 침묵이 장면의 공기를 지배한다. 애나(탕웨이)는 훈(현빈)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이유로 7년간 감옥에 있다가 72시간의 외출을 얻어 나온 애나는 우연히 만난 훈을 사랑하게 됐다. 몇 년 후 다시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나는 카페에 앉아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훈이었다가 다시 훈이 아닌 그 풍경 속에서 애나는 홀로 고요하다. 애나는 훈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을 때, 중국어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하오(좋아요)’와 ‘화이(안 좋아요)’만으로 추임새를 넣으며 경청하던 훈을 떠올릴 것이다. 애틋했던 입맞춤을 기억할 것이다. 훈을 만난 뒤 비로소 자기 앞에 놓인 새로운 시간을 바라보게 됐음을 상기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 사랑은 약속이며, 그것을 믿는 마음과 지키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니 이는 단연코 사랑의 장면인 것이다.

<월-E> 월-E와 이브

감독 앤드루 스탠턴

때로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보다 고독한 순애보가 심장을 후벼 판다. <월-E>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중 가장 로맨틱한 영화다. 쓰레기 더미로 변한 지구에 홀로 남아 쓰레기를 수거해 네모나게 압착하는 자신의 책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고독한 삶을 사는 월-E의 모습은 마치 산 위에 바위를 밀어 올리던 시시포스를 떠올리게 한다. 반복된 업무의 굴레에 갇힌 월-E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은 회사원은 없으리라. 월-E는 전형적인 30~40대 싱글남의 일과를 재현하는데 퇴근 후 VHS에 담긴 로맨틱한 뮤지컬을 보거나 쓰레기 중 괜찮은 물건을 수집하며 쓸데없이 무언가를 흥얼거린다. 그 순간 하늘에서 순백의 천사 이브가 내려온다. 그때부터 월-E의 따분한 일상은 파괴되고, 순애보가 시작된다. 그 순간부터 월-E는 시시포스가 아니며 일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되찾는다. 여러 사건들 끝에 결국에 이브는 절전 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반응 없는 이브를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다니는 월-E의 모습은 의식 없는 대상을 향한 연민과 구애, 자기애 등 사랑을 이루는 감정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이토록 사실적인 사랑의 형태를 그린 장면이 있었나 싶다. 우주선으로 송환되는 이브를 향한 월-E의 모험은 전위적이며 경이롭고 아름답다.

<악인> 유이치와 미츠요

감독 이상일

잿빛이던 세상이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환해지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뀌는 마법. 사랑이 부리는 요염한 힘이다. 그 힘은 세상의 높은 곳과 낮은 곳, 양지와 음지, 적당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이상일 감독의 <악인> 속 유이치(쓰마부키 사토시)에게도 사랑이 찾아든다. 하필이면 그가 살인자가 된 뒤에. 유이치에게 세상이란 세찬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겨울 바다 같은 곳이다. 무표정해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랑 따위? 기대한 적도, 꿈꾼 적도 없다. 그 이상한 밤, 유이치는 사람을 죽인다. 하필이면 그러고 난 뒤에 미츠요(후카쓰 에리)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한다. 채팅 사이트에서 대화한 적 있는 미츠요가 그날의 순수한 대화를 기억하며 보낸 메시지. 그렇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이 외로운 세상에서 서로가 얼마나 숨죽이며 살아왔는지. 그런 상대를 애틋하게 감싸 안아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도. 유이치와 미츠요는 세상의 끝에 있는 등대로 도망친다. 더욱더 거센 바람이 부는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그 며칠이 이 둘의 삶에서 가장 천국 같은 시간이다. 경찰의 수사망이 등대로 좁혀오는 그 순간에도 미츠요는 죽을힘을 다해 유이치를 향해 달려간다. 삶이 장밋빛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연인에게 닥치는 파국. 유이치와 미츠요가 서로를 으스러져라 끌어안는 마지막 포옹을 볼 때마다 그 흐느낌 위로 유이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너를 조금만 빨리 만났더라면….” 사랑이 이들을, 세상을 구원하게 하소서.

<아가씨> 히데코와 숙희

감독 박찬욱

습기 찬 욕실의 욕조에 누운 히데코(김민희)의 뾰족한 어금니를 숙희(김태리)가 자신의 오밀조밀한 손으로 갈아주는 장면의 로맨티시즘은 어떤 경계를 초월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보는 이가 남자건, 여자건, 이성애자건, 사춘기건, 환갑이건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야릇함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연애보단 전초전, 터놓기 전이지만 서로의 맘을 알고 있는 사이의 긴장감, 그 공기의 짜릿함까지. 그리고 비로소 한 침대에 뒤엉켜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는 장면에 다다랐을 때, “어쩜, 이렇게… 타고나셨나 봐요”라는 숙희의 가쁜 숨이 섞인 대사까지 듣는다면 그날 잠은 다 잔 셈. 로맨틱함의 정도를 ‘알콩달콩 가슴 설레는 사랑 이야기’ 정도로 국한하는 게 아니라면 밸런타인데이에도 <아가씨>의 습기가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길고 끈적한 호흡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형광등은 피하고, 되도록 밤에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