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만나는 바람의 언덕

엄마와 딸이 만나는 바람의 언덕

엄마와 딸이 만나는 바람의 언덕

엄마와 딸이 만나는 바람의 언덕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마침내 만난 엄마와 딸은 바람의 언덕에 서 있지만 이제 춥지 않다.

정은경 셔츠 코스(COS), 재킷 스튜디오 톰보이(Studio Tomboy). 장선 니트 스웨터와 팬츠 모두 코스(COS).

영화 <바람의 언덕>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 딸을 버린 엄마 ‘영분’과 딸 ‘한희’가 강원도의 작은 도시 태백에서 재회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분은 한희에게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딸이 운영하는 필라테스 교습소의 수강생이 되고, 인적 없는 밤길에 필라테스 교습소 홍보물을 붙이며 딸의 삶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한다. 가까운 친구 하나 없이 교습소 텐트에서 살아가는 한희는 그런 영분이 있어 외롭지 않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던 영분과 한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듯한 시간을 맞을 수 있을까? 그리고 더 이상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엄마와 딸인 영분과 한희를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 장선 시나리오를 읽고 가장 크게 다가온 건 도시의 이미지였다. 하얀 눈이 쌓인 언덕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추운 겨울이어서 더 잘 느껴지는 따듯함이라고 할까? 아주 추운 겨울이지만 따듯한 기운이 오밀조밀하게 담겨 있었다. 시나리오로 한희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때까지 생각했던 인물과 달랐다. 난 좀 더 담담한 아이일 줄 알았다. 어른스럽고 혼자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 스스로 자신을 어른이라 생각하는 아이. 반면 시나리오 속 한희는 여리고 누르려고 하지만 외로움이 보인다. 정은경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안쓰러웠다. 영분과 한희뿐 아니라 태백에서 만난 윤식 씨, 전남편과 함께 살던 아들 용진 모두 외롭게 다가왔다. 영화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살면서 한번쯤 만났을 것 같고, 내 안에도 그들 각자가 가진 외로 움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그중에서도 영분은 씩씩하게 애쓰며 사는 모습에 연민이 생겼다.

처음에 생각한 한희와 달랐던 시나리오 속 한희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나? 장선 박석영 감독님이 한희는 오랜 투병 생활을 끝내고 세상에 막 나온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저렇게 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 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을 터놓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 하나 없이, 두려움이 많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시나리오에는 인물의 과거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한희와 영분은 어떤 서사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장선 한희는 공황장애로 인한 과호흡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고아원에서 선택받고 싶은 마음에 생긴 스트레스에서 온 병일 것이다.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다 한 입양처를 두고 자신도 모르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이아이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과호흡증후군을 이겨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 운동이 좋아 자격증까지 따서 고향에서 필라테스 교습소를 차린 거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지만 그래도 고향 태백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정은경 영분은 결혼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책임감이 필요할 때면 외면하고 떠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버렸겠지. 그 일에 대한 죄책감도 가지고 있고. 하지만 늘 주체적으로 살아 왔을 것이다. 자존감도 높고 타협하지 않으며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 안주하며 살지 않다 보니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나게 되고. 젊었을 때는 청년의 욕망을 좇았지만 중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 모른 채 정착하지 못하며 산 게 아닐까?

늘 떠나기만 한 영분이 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까? 정은경 죽은 남편을 굉장히 따듯하게 보내줬다고 생각했기에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분은 한희에게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엄마다. 책임을 지기보다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자신을 좋아해준, 사별한 남편이 편히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간병했기에 이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다. 죽은 남편을 잘 떠나보내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바람의 언덕>을 떠올리면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생각나나? 장선 영분과 윤식이 막걸릿집에서 함께 노래하는 장면을 가장 사랑한다. 이들의 살아온 시간이 느껴 졌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이 장면이 너무 사랑스 러워서 웃음이 나다 눈물이 흘렀다. 영분도 사실은 누군가 보듬어야 할 소녀이던 시절이 있었을 테고, 그 시절을 보내며 살아온 세월이 담긴 장면이어서 좋았다. 한희가 영분이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처음 수업하는 장면도 마음에 많이 남는다. 그리고 엄마를 만나기전 언덕에 올라 바람을 맞는 장면이 좋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외에 로드쇼 형식으로 영화 상영회를 진행해왔다. 개봉 전 영화를 본관객이 꽤 많은데 관객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정은경 중년의 한 여성 관객이 영분의 ‘무섭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이 무섭고 그동안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니 무섭고. 우리 모두 그러지 않나. 많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앞으로 다가올 삶이 무서운 거지. 한번은 관객과의 대화 (GV)가 끝난 후 한 노년의 관객이 박석영 감독님을 부르더니 앉혀놓고는 엄마가 영분이처럼 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엄마란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웃음) 장선 GV에서 다양한 감상을 들을 수 있다. 한번은 태백 바람의 언덕에 가본 적 있다는 한 고령의 할머니가 6·25 때부터 자신의 삶을 얘기하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주셨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그이상을 얘기하는 관객을 만나면 놀랍고 울컥할 때가 있다. 한 관객이 웃으면서 살라고 엄마가 ‘한희’라는 이름을 지어줬을 텐데 막상 딸을 만났을 때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든 웃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많이 날것 같다고도 하셨다. 정은경 영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젊은 관객도 있었다. 가족을 미워하고 대화도 잘하지 않는다던 그 관객은 감독님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용기 내어 가족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했다.

자식을 두고 떠났으면서 다시 돌아와 이해와 용서를 구하기보다 도리어 화를 내는 엄마 영분과 원망의 감정 하나 없이 엄마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한희 모두 이해 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장선 누구보다 한희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끝까지 원망 한 번 못 하는 한희가 속상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영화에서는 이런 인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말이 큰 힘이 되었다. 정은경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영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엄마가 왜 이런 거지. 내가 연극에서 연기한 엄마는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자식에게 내어주고도 미안해하는 엄마였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이런 존재 인데 과연 내가 영분을 잘 연기할 수 없을지 걱정도 되었다. 첫 장면을 끝내고 태백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며 다 털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감독님 말씀처럼 하루 하루 열심히 사는 인물을 만들며 연기했다. 작품을 끝내고 관객과 만나면서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엄마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박석영 감독은 왜 영분을 일반적인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정은경 처음에는 감독님에게 아이를 버린 엄마라면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그 아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고, 아이를 만나면 용서를 구하고 엄마와 딸로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야 더 많은 관객이 공감하고 영화를 보러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때 감독님이 영분이 엄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지점에서 감독님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엔딩이 가장 좋다. 정말 좋다. 엔딩 장면을 두고 감독님이 바꾸자고도 했는데 나는 계속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억지로 해피 엔딩을 맺기보다는 엄마와 딸로서 각자 서로 사람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다.

오늘 문득 떠오르는 현장에 대한 기억이 뭔지 궁금하다. 정은경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건 <바람의 언덕>이 처음이다. 모든 스태프가 배우들을 배려하고 그림처럼 눈이 내린 현장이 참 아름다웠다. 훌륭한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현장에서 지금까지 없던 엄마를 연기할 수 있어 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태백도 아름다웠다. 밤이 되면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이 우리만 있는 느낌이 들었고, 눈이 펑펑 오고 기차가 영화처럼 지나갔다. 장선 태백에 서 만난 사람들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자주 갔던 밥집 이나 술집 사장님도 그렇고, 엄마가 일했던 ‘햇빛 모텔’ 사장님도 그렇고. 촬영을 마치고 떠날 때 아쉬워하는 사장님도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태백에서 보낸 시간도 즐거웠다.

<바람의 언덕>을 통해 관객과 어떤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가? 정은경 많은 여자들이 봐주었으면 한다. 나도 영화를 보고 엄마가 생각났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생전 나를 위해 참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특별한 날 신으려고 사두었던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그대로 상자에 담아두었다가 결국 내게 신으라며 주던, 늘 가족을 위해 참으며 희생하던 나의 엄마처럼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영분과 다른 삶을 산다. 엄마 덕분에 지금 내가 잘 살아 가고 있는 거겠지만 우리 엄마도 영분처럼 참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정해진 틀에 맞춰진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로 살아 왔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일이 무섭다는데 공감할 것 같다. 이렇게 공감하다 보면 다른 삶도 인간으로서 이해하기보다 소통할 수 있지 않겠나. 나도 그렇게 자기를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백하는 것. 영화가 그런 용기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선 부산에서 상영할 때 엄마와 남동생이 영화를 보러 왔다. 그때 남동생이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만큼 오열하며 봤다. 남동생 때문에 엄마가 도리어 눈물이 쏙 들어갔다더라. 그렇게 엄마와 자식이 함께 봤으면 좋겠다. <바람의 언덕>은 인물들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용진은 스스로 아빠가 투병 생활을 했던 침대를 정리하 고, 엄마는 다시 한 번 떠나려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한희도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런 변화가 그들에게는 어딘가에 매어 있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가 된다. 영화를 보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한 힘과 위로를 얻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만들며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장선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지 못하겠더라. 많이 울 것 같았다. 엄마가 엄마라는 호칭이 아니라 당신 이름으로 불리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으 면서 나도 모르게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엄마는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에게 미안해했다. 자신의 삶을 돌보느라 날 놓은 시간 동안 내가 혼자 자라버린 것 같다고 했다. 엄마도 영분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을 텐데 내뱉지 못하고 혼자 삭이며 살아 왔겠지. 이런 생각이 드니 원래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와 더 가까워졌다. 정은경 나에게 늘 다 주었던 엄마가 고맙다. 엄마가 그랬기에 나 역시 인내하며 살 수 있었다. 나에게 엄마는 어떤 점에서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갖기보다 씩씩한 엄마로 기억하고 싶다. 행복하고 예쁜 모습으로 씩씩하게산 엄마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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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ST COVID – 19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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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ST COVID – 19 ②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우리 삶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온 힘을 다해 그 답을 찾아가고 있다.

 

NETHERLANDS

성지예

전략 컨설턴트, Human Rights Foundation

혐오의 바이러스

코로나19는 아시아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며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인권 단체 Human Rights Foundation에서 일하는 한국인 성지예 씨는 인종차별 피해를 자신의 SNS에 알리며 이 문제를 보다 공론화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2017년에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대학에서 사회과학기술학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석사 학위를 따고 구직 비자를 받은 후 현재 인권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두 가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북한 내 정보 유입을 위한 캠페인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매년 오슬로, 타이베이, 뉴욕,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인권 콘퍼런스 시리즈인 오슬로 자유 포럼(Oslo Freedom Forum)의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해외 에서는 사재기도 심각하다고 알려졌다. 네덜란드는 사스나 메르스 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고 정부의 대응 방침이 한국보다 느리고 느슨한 편이어서인지 사람들이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렸다.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인과 면역력이 떨어 지는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3월 중순부터 정부에서 자발적인 자가격리 및 1.5미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장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잘 지키지 않아 3월 27일부터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3월 초부터 손세정제나 마스크, 소독용 알코올이 보이지 않고 마트에서는 파스타, 밀가루와 휴지의 사재기가 심하다. 도시와 마트마다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 지난주 헤이그의큰 마트에 갔을 때는 휴지를 제외한 모든 상품이 넉넉했 다. 주요 장보기 배달 서비스들은 3주 후까지 예약이 끝났다. 반면, 장보기가 힘든 이웃을 위해 장 대신 봐주기, 도매상들이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이미 구매한 식재료 나눠 주기, 이웃인 농부를 대신해 상품을 SNS에 홍보 해주기, 그리고 이웃과 안부 교환하기 등의 마음 따뜻한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정부는 프리랜서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에 대한 생활 보조금 지급 등의 대책을 빨리 마련한 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인종차별이 이전에 비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가? 이전부터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존재했다. 이를테면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 ‘행키 팽키 상하이 칭챙총’ 등의 가사로 이루어진 중국인 비하 노래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발언, 행동, 폭력을더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마치 마녀사냥처럼 ‘너희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 같은 논리인 것 같다. 인종차별로 인한 여러 사건은 코로나19가 유럽에서 발생하기 전부터 있었고 지금은 그것을 구실 삼은 것뿐이다. 차별주의자에게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실제로 코로나19가 유럽에 확산되면 사람들이 아시아인을 탓하지 않고 사회적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인종차별 문제가 완화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심해진 인종차별 피해에 대해 SNS에 알렸다. 2월 말 저녁 10시 30분쯤 운동 수업이 끝나고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스쿠터를 탄 20대 남성 둘 중 뒤에 앉은 사람이 나를 보고 ‘중국인’ 이라 외치며 내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잘 피했고 늦은 시간이라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집에 최대한 빨리 돌아와 경찰에 신고했다.

” 내가 겪은 인종차별에 대해 들은 네덜란드 친구들이
이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본 후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공론화하게 되었다. “

그 사건을 SNS에 공개한 후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나? 많은 친구들이 괜찮느냐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수많은 아시아인들이 자신이 겪은 사건이나 주변의 다른 아시아인이 겪은 사건을 공유했다. 이런 메시지와 수백 개의 긍정적인 댓글을 보니 공론화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흑인에 대한 차별 반대 운동을 시작한 활동가,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 아시아인들의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중국계 네덜란드인 등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사건 이후 인종차별주의 관련 설문 조사도 진행했다. 어떤 내용의 조사였는가? 4월 1일 현재 총 187건의 인종차별 관련 사건이 접수되었고, 사건을 겪은 곳(장소, 도시, 나라), 가해자의 수와 성별 등 상세한 내용을 항목으로 기록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까지 약 10% 정도의 사건이 신체적 위협 혹은 폭행 사건이었고 피해자의 약 80%는 여성, 가해자의 약 84%는 남성이다. 대부분의 사건은 낮에 발생했고 가해자는 2~3명인 경우가 65% 정도, 한 명인 경우가 20% 정도다.

관련 캠페인도 준비 중이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인가? 우선 이곳에 거주하는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보고하고 기록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것, 더 나아가 다른 반인종차별 단체들과 연대해 시위나 워크숍을 진행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래픽디자인, 학술 논문, 사회운동 등 여러 각도로 접근하고 있다. 인종차별주의로 인한 피해에 그치지 않고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이렇게 공론화한 이유가 있다면? 최근까지 많은 아시아인이 차별을 겪으면 피해자로 보이기 싫어서, 혹은 말하더라도 이해받지 못해서 참았다. 그런데 말이 한번 트이니 공론화가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우리끼리 고충을 나누자는 취지였다. 외부적으로는 공론화를 통해 네덜란드 사람들이 현재 알고 있는 인종차별의 범주에 아시아인도 들어가게끔 하고자 했다. 인종차별은 흑인이나 아랍계 이민자만 겪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것이 아닌 이상 주변에 아시아인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아시아인은 쉬운 타깃으로 인식되곤 한다. 이런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칭챙총’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따지고 사과를 요구하면 순순히 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네덜란드에 계속 살고 싶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내가 겪은 인종차별에 대해 들은 네덜란드 친구들이 이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본 후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하게 되었다.

얼마 전 네덜란드의 일간지 <폴크스크란트(VOLKSKRANT)>와 인종차별주의와 관련해 인터뷰를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심각해진 여러 인종차별 사건에 대해 제보했는데 어떤 사건들이었는가? 설문 조사에서 취합한 사건들로 주로 신체적 위협을 가한 폭력 사건들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 밀쳐서 넘어졌거나 유모차를 끌고 가는데 어떤 네덜란드 남자가 “코로나 코로나”라고 하며 유모차 바퀴에 침을 뱉은 사건, 집 외벽에 나치 문양을 그려놓고 간 일, 마시던 음료를 던지며 성희롱한 사건, 네덜란드 아이들에게 구타당한 일본인 아이 사건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코로나”라고 외치며 조롱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바이러스라도 본 듯 피해가는 일도 있었다. 아시아인을 향한 차별이 여러 나라에서셀 수 없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의 행동들이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네덜란드에서는 각종 반차별 법안들이 존재한다. 이 중 인종차별에 대한 내용도 있고, 다양한 반인종차별 단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는 오래 걸리고, 이제까지 아시아인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적어서 변화가 더 느렸던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던 친구들이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배우며 변해가는 모습을 봤다. SNS에 관련 글을 올리면 나 대신 악플러들과 싸워 주고 화내며 우리나라에서 차별을 겪어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도 하고,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알려줘서 고맙다는 사람들이 많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면 대부분 납득하고, 차이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어딜 가나 차별주의자는 존재한다. 아시아인을 놀리는 게 ‘쿨하다’고 여기는 차별주 의자들에게 실제로는 ‘쿨하지 않다’는 사회적 인식을 심어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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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권윤수

기자, 대구mbc 보도국

대구, 봄

2월 29일, 대구시청의 브리핑 룸에서는 어김없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확진 환자 수가 발표되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전일 대비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741명 증가했다고 발표했고, 이날을 기점으로 대구의 총 확진자 수가 2천 명을 넘어섰다. 대구 MBC 보도국 권윤수 기자는 대구에서 첫 확진 환자가 발생했을 때부터 대구시청 브리핑 룸에서 코로나19 관련 소식을 전했다.

” 확진 환자가 급격히 늘면서 의료진도 부족했는데
가족들의 만류와 두려움을 무릅쓰고 달려와준
타 지역 의료진을 봤을 때 희망을 보았다. “

코로나19와 관련해서 어떤 일을 맡았는가? 대구 MBC 보도국에서 대구시와 대구시의회를 담당하고 있다. 대구에서 코로나19 첫 확진 환자가 발생했을 때부터 대구 시내 환자 발생 현황과 추이, 역학조사 결과, 방역 대책, 방역의 문제점 등을 취재했다. 대구시가 매일 환자 발생 현황과 역학조사 결과에 대해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했고 매일 브리핑 룸에 들어가 궁금한 점을 질의 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확진 환자가 집중된 2월 말과 3월 초에는 생중계도 많았다. 전국에 방송되는 <MBC뉴스데스크>에서 대구를 연결하면 코로 나19 관련 대구 소식을 전하는 일을 했다.

매일 코로나19 관련 보도를 위한 업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매일 오전 대구시청으로 출근한다. 출입 기자실에 가서 조간을 빠르게 훑어보며 놓친 부분이 없는지 살핀 후 오전 10시에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하는 전국 코로나19 확진 환자 현황을 확인한다. 그 자료를 통해 대구와 경북 지역 환자 수의 증가 추이를 본다. 오전 10시 30분에 브리핑이 시작되면 내 업무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브리핑을 바탕으로 당일 뉴스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 내용을 빠르게 받아 기록한다. 보도국의 다른 기자들과 내용을 공유하고 중요한 내용을 선별한 후 리포트를 작성해 뉴스 시간에 방송한다.

얼마 전 대구 MBC에서 코로나19 발병 이후 대구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 터리 <대구, 봄>을 방영했다. 관련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입장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집에서 진료받기를 기다리다 숨진 환자가 생겼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다.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대구에서 확진 환자가 하루에도 수백 명씩 나왔다. 연수원이나 기숙사 등을 활용한 생활치료센터가 생기기 전에는 모든 환자를 병원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병상이 턱없이 부족해 2천 명이 넘는 확진 환자들이 집에서 병상이 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바이러스는 폐를 급격하게 빨리 손상 시키기도 한다. 확진 판정을 받고 이틀 정도 집에서 입원을 기다리던 한 환자가 갑자기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현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도 써보지 못하고 의사도 한 번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신 거니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다.

다큐멘터리 <대구, 봄>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보도한 일련의 일들이 스쳐 지났을 것 같다. <대구, 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겼다. ‘대구를 본다’ 그리고 ‘대구의 봄’. ‘대구시민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대구를 지켜 보며 봄을 맞이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에서 첫 확진 환자가 나온 지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코로나19 특집 내레이션 녹음을 했다. 한 달 동안 일어난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상에 아름답게 담겼던 봄꽃을 보니 올해에는 봄꽃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채 영상으로나마 만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놓치고 있던 일상이 그리웠다. 이 시간이 지난 후 마스크 끼지 않고, 또 2미터 거리를 두지 않고서도 서로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매일 만났던 사람들의 코와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 같다. (웃음) 마트나 시장에도 마음껏 가고 싶다. 온 가족이 장 보러 나가서 먹을 음식을 함께 장만하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취재를 준비하며 절망을 느꼈을 때와 반면에 희망이 보였을 때가 궁금하다. 선명히 기억난다. 2월 29일. 권영진 대구시장이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전일 대비 741명이 증가했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튀어나왔다. 대구에서 코로나 19 환자가 2천 명을 넘긴 순간이기도 하다. 대구 시내 병원에는 더 이상 병상이 없어 아주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자체에서 흔쾌히 병상을 내어주는 것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 확진 환자가 급격히 늘면서 의료진도 부족했는데 가족들의 만류와 두려움을 무릅쓰고 달려와준 타 지역 의료진을 봤을 때도 희망을 보았다.

코로나19 이후 한국 언론의 몇몇 보도가 비판을 받았다. 언론인으로서 이런 보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나? 언론인이기에 앞서 대구시민이기에 ‘대구 코로나’라는 기사 제목을 뽑는 언론사들을 보고 화가 났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으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대구시민에게 상처가 되는 행위였다. 또한 언론사들의 취재 경쟁이 과열되면서 방역 당국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자료도 많이 요구했는데, 이런 행동이 방역에 힘써야 하는 당국을 오히려 더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기도 했다.

재해와 재난을 보도하는 언론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것 같다. 언론인으로서 가진 고민이 있다면? 정부가 코로나19 관련 정보를 숨기지 않고 신속하게 공개해 좋아진 취재 환경을 실감했다. 중앙 정부와 대구시에서 매일 브리핑을 하는 건 과거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기자 들이 브리핑 룸에서 질문을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정보 공개 요구가 한꺼번에 몰리면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큰 틀에서는 정부와 방역 당국이 코로나19와 관련된 정보를 즉각 공개해 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방역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취재나 과열 경쟁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대구의 현장에서 매일 취재할 때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사실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전국에서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보니 대구를 막연히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대구시민과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 간에 온도 차가 있는 것 같다. 대구 전체 인구는 2백43만 명 정도 된다. 그중 확진 환자는 7천명 정도. 비율로 따지자면 0.28%다. 게다가 신천지 교인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내 가족 혹은 직장 동료가 신천지 교인이 아니라면 내가 감염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구의료원 선별진료소 바로 앞에서 생중계할 때는 잠시 약간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방송하는 동안에도 기침하는 환자가 다른 사람에게 업혀 선별진료소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변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삶의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으로 인해 ‘만남’이 많이 줄었다. 친구, 동료와의 만남은 물론이고, 취재 활동에 필요한 사회적 교류도 많이 줄었다. 코로나 19 취재를 시작하면서 업무가 많아졌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초기에는 야간 취재나 새벽 취재도 잦았다. 뉴스 시간에 생방송 연결을 하루에 네다섯 번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업무 형태가 이전 수준으로 돌아와서 정상 리듬을 찾았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지만 반면에 많은 사람이 힘을 보태고 있다. 그중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개인적인 얘기인데, 친정어머니를 응원하고 싶다. 코로나19로 개학이 늦춰져 내 두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으시다. 요즘에는 바깥 활동도 하지 못하니 집에서 온종일 손주들과 씨름하시는 어머니께 죄송하다.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고생 많으시다고, 힘내시라고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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