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뉴트럴

젠더 뉴트럴

젠더리스, 젠더 뉴트럴, 젠더 플루이드….  패션계는 물론 뷰티와 아트까지 아우르는 젠더리스의 흐름은 시대에 맞춰 조금씩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코코 샤넬이 탄생시킨 중성적인 앤드로지너스 룩,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룩, 장 폴 고티에가 남성을 위해 선보인 스커트 컬렉션 등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쇄도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여성이 매니시한 수트를 입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원피스를 입거나 화장을 하는 남성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또한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은 어떤가. 패션계에는 부드러운 이미지나 여성스러운 외모를 지닌 남성 모델, 파워풀한 인상의 여성 모델 그리고 트랜스젠더 모델이 하이패션의 얼굴로 떠오르며 동시대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패션을 넘어 뷰티업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모호한 젠더 플루이드 캠페인이나 젠더 뉴트럴 코스메틱 브랜드가 등장하고 글래머러스한 메이크업을 한 남성 모델의 영상 콘텐츠를 감상하며 신선한 생각의 전환을 경험하는 일이 일상적이다. 이처럼 젠더 뉴트럴은 이제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지속적인 흐름으로 그 스펙트럼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별이 아니라 다양성과 취향,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그런 만큼 누군가를 고정된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스스로 정한 기준에 맞춰 바라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변화를 피부로 실감할 때가 젠더와 자기표현에 누구보다 자유롭고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유튜브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인 일명 젠지가 젠더를 대하는 ‘쿨’한 태도를 목격할 때다. 특정 디자인이나 컬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젠지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시선을 볼 때면 세상 어딘가 한편에 존재하던 성별에 대한 경계나 선입견을 단숨에 허물어버리는 듯하다. 그들이 열광하는 틱톡만 봐도 이미 수많은 젠더 뉴트럴 틱톡 스타들이 성별을 떠나 우리 모두를 위한 젠더리스 콘텐츠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런 틱톡 스타들이 매거진의 모델로 등장하거나 브랜드의 인플루언서로서 그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영향력 또한 가늠할 수 있다. 젠지들은 성별의 구분을 뛰어넘어 젠더 뉴트럴 틱토커나 아티스트들이 추구하는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오늘날 오래도록 고정된 젠더 관념을 한층 더 새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키를 손에 쥔 세대로 거론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브랜드들 역시 이런 변화에 앞장서며 이들의 유동성에 발을 맞춘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한 이후, 줄곧 젠더리스 컬렉션을 선보여온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데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다. 그가 추구하는 젠더리스 패션은 점점 획기적이면서도 일상적인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데, 여성스러운 레이스 블라우스는 물론 과감한 크롭트 룩을 입은 남성 모델을 런웨이에 세우거나 성 정체성이 모호한 모델들을 기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찌 웹사이트에 ‘MX’ 메뉴를 추가해 젠더리스 온라인 쇼핑마저 가능하게 했다 (아쉽게도 구찌 코리아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다).

구찌 뷰티에서도 젠더 플루이드에 대한 미켈레의 관점을 명확하게 엿볼 수 있다. 구찌 뷰티의 글로벌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토마스 드 클루이버(Thomas de Kluyver)는 성별은 물론 인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그야말로 ‘모두’를 위한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럽고도 모호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뷰티라고 이야기한다. 성별 카테고리를 없앤 젠더 뉴트럴 섹션은 패션과 뷰티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요주의 키워드가 됐다. 스텔라 매카트니 역시 남녀 공용 컬렉션인 ‘셰어드(Shared)’를 론칭했고, 젊은 브랜드 텔파(telfar)는 남녀 누구나 접근 가능하도록 텔파 백에 ‘유니섹스’라는 이름을 덧붙였으며, 런던엔 아디다스 젠더 뉴트럴 컨셉트 스토어가 개장하며 이 흐름의 또 다른 챕터를 열었다.

젠더 뉴트럴을 모토로 브랜드를 이끄는 디자이너들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 이 중 해리스 리드(Harris Reed)는 요즘 가장 뜨거운 영향력을 선사하는 젠더 뉴트럴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터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눈도장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그는 해리 스타일스의 의상을 제작했으며 에즈라 밀러, 솔란지 놀스, 리한나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리드는 성별을 정의하지 않는 우아하고 드라마틱한 실루엣의 쿠튀르가 연상되는 컬렉션을 선보이는 한편, 뷰티나 주얼리 분야와 협업하며 젠더 플루이드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오늘날의 젠더 뉴트럴은 단순히 옷차림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관점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는 데 일조하는 변화가 주를 이룬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러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쌓이다 보면 과도기를 거쳐 매니시한 수트를 입은 여성들을 당연시하는 지금처럼 ‘젠더’를 정의하거나 ‘젠더리스’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여성스러움이나 남성스러움을 떠나 그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본질적인 물음에 이목을 집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