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런던 사무실에 있는 인스타그램 COO 마르니 리바인

인스타그램의 최고운책임자 (COO)로 취임한 지 몇 주 뒤, 마르니 리바인(Marne Levine)은 페이스북 구내 팝업 카페에 들러 들뜬 기분으로 주문한 라테를 받아왔다. ‘나는 지금 인스타그램에서 일하고 있어, 그러니 이걸 찍어야 해. 그게 사진을 공유하는 사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어?’ 리바인은 생각했다. 그녀는 라테 아트, 소시지, 아사이볼 등에 필터를 적용한 후, 수천 명에 이르는 팔로어의 엄청난 반응을 기다리며 ‘공유’를 눌렀다. 반응은 생각보다 시원찮았고 곧 그녀는 모든 것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나는 커피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 사진을 찍진 않죠. 그건 제 방식이 아니에요”라고 리바인(46세)은 말한다. 사진을 올리고 많은 호응을 얻는 데 실패한 직후 그녀는 인스타그램의 생명은 진정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사회적 동물이에요. 그러니까 대상물이 커피가 되어서는 안 되죠.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해요.”

이미지 기반 플랫폼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어쩌면 예견 된 일이다. 관료직에 종사하던 이전 커리어와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리바인은 2014년 말 첫 COO로서 인스타그램에 합류하기 전 10여 년 동안 정부에서 여러 정책과 관련된 역할을 맡았다. 오랜 친구이기도 한 페이스북의 COO 셰릴 샌드버그의 지원을 받으며 리바인은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인스타그램이 2016년 멜버른에서 열린 주최한 #CreativeCollisions 행사에 참가한 리바인

그녀의 책상은 건물 맨 위층인 3층에 있는데, 그곳의 회의실은 모두 인스타그램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도그 패치(Dogpatch)’와 ‘사우스 파크(South Park)’라는 이름의 회의실도 보인다. 이는 모두 2010년 설립한 인스타그램이 2012년 페이스북에 인수되기 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사무실이었다. 리바인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노필터 (#NoFilter)’다. “나는 슈퍼 디렉터예요. 난 사람들이 여기 와서 단어를 선택해가며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하이오주의 마이애미 대학에서 정치학과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1992년에 졸업한 후 리바인은 유명한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와 함께 재무부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샌드버그를 처음으로 만났고 그녀를 좋아했지만, 리바인은 서머스의 수제자 중 하나기 때문에 서머스가 2001년에 하버드 대학교 총장이 되었을 때 그를 따라갔다. 리바인은 서머스의 수석보좌관으로 일했고, 2003년 하버드 경대학원에 입학했다. 하버드의 교수들은 대부분 리바인과 서머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서머스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어느 날 한 교수님이 ‘그건 래리 서머스의 생각이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라고 묻더군요. 그 때 내가 자신의 일부를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하지만 경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리바인은 여전히 서머스와 함께 일했다. 2009년 서머스가 버락 오바마 정부의 국가 경제위원회 회장이 되었을 때도 그의 수석보좌관이 되었다. 2010년 말 어느 날, 리바인은 샌드버그에게 전화를 받았다. 페이스북의 대외 정책 부문을 이끌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싫다고 했어요. 당시 저는 제가 꿈꾸는 직업을 갖고 있었거든요. 백악관에서 정책을 만드는 일은 최고의 직업이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자 재생에너지 투자자인 필 도이치(Phil Deutch)는 생각이 달랐다. “남편이 나더러 게으른 사상가일 뿐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페이스북 같은 회사에서 정책을 다루는 게 어떤 일인지 상상도 못할 거라면서 말이죠. 남편의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유명한 COO가 그녀의 친구지만, 페이스북 면접은 쉽지 않았다. 리바인은 회사의 주요 인물 7명과 하루 종일 면접을 치렀다. 그 절정은 마크 저커버그와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NDA(기업 간 기밀 유지 협약)에 대한 페이스북의 태도에 감사한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리바인은 저커버그가 매우 호기심이 많고 생각이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리바인은 며칠 뒤 페이스북의 글로벌 대외 정책 부사장직을 수락했다. “페이스북은 내가 정부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것 중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똑똑하고 사려 깊으며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더불어 리바인은 소셜 네트워크 문화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테이블에 앉아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 의견을 데이터로 보강한 후 제안하는 것, 이게 페이스북의 방식이에요.”

인스타그램에서 보낸 처음 6개월은 녹록지 않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데다 워싱턴에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월요일 아침마다 대륙 반대편에 있는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2015년 8월에 가족 모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하지만 샌드버그는 그녀에게 입사 직후에는 인상적인 실적을 내는 데 전념하라고 조언했다. 리바인은 이를 악물고 일에 매달렸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자마자 신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을 볼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 리바인은 세계적으로 빠르게 세를 확장하며 앱 사용자 기반을 두 배로 늘렸다(인스타그램은 싱가포르와 도쿄 등 미국 외 8개 지역에 직원을 두고 있다). 그녀는 페이스북의 스폰서 포스트 같은 광고 플랫폼을 책임지고 있는데, 2017년 말쯤에는 약 30억 달러의 매출을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에 그녀가 이끄는 팀은 페이스북 ‘라이브’ 스트리밍 비디오를 론칭하기도 했다. 리바인은 이 모든 성과의 공을 진취적인 여성들에게 돌린다. 가구 디자이너에서 패션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에서 셰프에 이르기까지 인스타그램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이 바로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인스타그램에 끌리는 이유는 인스타그램이 스토리텔링 플랫폼이기 때문이에요. 여성은 늘 놀라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죠.” 리바인은 정기적으로 세계를 여행하는데, 주로 여성 기업가의 사회 진출이 가로막혀 있는 나라를 방문해 여성 창업가들을 만난다. 그들이 인스타그램에 보이는 충성도와 열정은 협력을 이끌어내고 광고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모바일 기기로 여성들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의 파워 덕분에 리바인은 힘을 얻는다. “여성들은 정보와 지원, 시장뿐 아니라 자본에까지 접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죠. 놀라운 여권신장의 발판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