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니치 향수 브랜드의 점심 식사 자리에 초대돼 프랑스인 여성 창립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향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한국 여성과 프랑스 여성의 뷰티 루틴에 관한 대화로 이어졌다. 그녀는 앞에 놓인 빈 접시 위에 손가락으로 구획을 나누면서 두 나라 여성이 뷰티 제품 중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향수에 투자하는 비중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내용이 꽤 그럴듯했다. 프랑스 여성이 향수에 50% 이상을 투자한다면 한국 여성은 그만큼을 스킨케어에 투자한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한국 여성이 여러 단계의 스킨케어 제품을 쓰는 것이 신기하다며 에디터에게 몇 단계의 제품을 쓰는지 물었다. 이전 같으면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클렌저, 토너, 부스팅 에센스, 세럼, 아이크림, 크림, 페이셜 오일 등 단계별로 줄줄이 꼽았겠지만, 전날 자기 전 사용한 제품을 떠올려보니 클렌징 워터와 부스팅 에센스, 모이스처라이저, 립밤이 전부였다.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니 나 자신도 놀라웠다. 한때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여러 제품을 단계별로 바르던 내가 이처럼 달라진 계기는 임신 후 심각한 피부 트러블을 겪었기 때문이다. 급격한 호르몬 변화 탓에 지루성피부염이 생긴 데다 피부가 붉게 달아 오르고 간지럽기 시작했는데 어떤 제품을 써도 증상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보습과 진정 기능이 전부인 모이스처라이저만 겨우 바를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피부가 오히려 더 건강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매달 1백 가지가 넘는 신제품을 소개하는 칼럼을 몇 년간 진행하면서 테스트하느라 피부가 점점 예민해지고 트러블도 잦았던 터라 이런 변화가 놀랍기만 했다. 요즘은 피부 상태에 따라 필링 제품이나 앰풀, 기능성 세럼, 마스크 팩 등을 추가하기도 하지만 전처럼 매일 밤 여러 제품을 단계별로 겹겹이 바르지는 않는다.
이처럼 스킨케어 단계를 줄이고, 보습과 진정, 피부 장벽 강화 등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화장품을 선호하는 추세는 트렌드를 넘어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메이크프렘, 쥴라이, 가온도담, 라운드어라운드, 라곰, 플로우, 탬버린즈 등 지난 2년간 ‘미니멀 뷰티’를 표방하는 신규 브랜드가 눈에 띄게 많아진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에 발맞춰 아이오페, 에뛰드하우스, 이니스프리, 더페이스샵 같은 기존 브랜드도 미니멀과 저자극을 내세운 스킨케어 제품을 경쟁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요즘은 많은 여성들이 미니멀한 스킨케어 루틴을 선호하는데, 클렌저와 토너, 모이스처라이저 등 스킨케어 단계를 단순화한 더모 코스메틱 시장의 성장과 ‘화해’처럼 화장품 성분에 초점을 맞춘 앱의 활약이 이러한 변화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어요.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피부가 예민해지고 피부 트러블이 많이 생기는 것도 영향을 주었죠. 이 때문에 피부가 민감해져 피부과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져 스킨케어 제품을 최소한만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어요.” 와인피부과 김홍석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또 피부과 시술 기기의 발전으로 시술 시간이 짧아지고 시술 후 곧바로 일상 생활이 가능한 시술이 늘어나면서 과거 기능성 화장품에 의존하던 미백이나 탄력 개선 등을 피부과 시술로 해결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도 미니멀 뷰티 트렌드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SNS가 활성화되다 보니 사진이나 영상으로 즉각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메이크업 제품에 대한 투자는 증가하는 반면, 스킨케어 제품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정샘물 원장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SNS의 영향도 물론 있겠지만 한국 여성의 생활 패턴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 다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각자의 기준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최대한 간편하게 줄이는 거죠. 스킨케어에서는 그것이 단계가 될 수도 있고, 제품이 될 수도 있죠.” 그러고 보니 최근 우리 사회의 큰 관심사 중 하나가 일과 삶의 균형, 건강한 일상의 회복이다. 서점의 자기 계발서 코너에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자존감 수업> 같은 자존감을 다룬 책이 넘친다. 한국 여성들이 그만큼 자신을 지키며 살기에는 이미 많이 지쳐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스킨케어 단계가 갈수록 줄어드는 데는 삶의 피로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글로우 레시피의 사라 리 대표는 화장품 성분과 기술의 진화도 스킨케어 단계를 줄이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한다. “화장품의 기능이 향상되고, 멀티 기능의 제품도 많아지면서 굳이 여러 개의 제품을 바를 필요가 없어졌어요. 꼭 필요한 화장품만 구매해 비용도 아끼고, 스킨케어에 드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는 셈이죠.”
그렇다면 건강한 피부를 위해서는 스킨케어 단계를 줄이고, 사용하는 화장품의 성분을 줄여나가는 것이 답일까? “여러 단계의 스킨케어 제품을 사용하면 피부에 닿은 화장품 성분의 종류도 많고, 그만큼 피부에 자극을 줄 확률도 높기 때문에 민감성 피부라면 화장품 성분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피부 타입에 따라 적합한 화장품 성분도 달라지므로 일괄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죠. 예를 들어 지성 피부에는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는 페트롤라툼 같은 성분이 극건성 피부에는 수분 손실을 막는 최고의 밀폐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와 상담해 본인의 피부 타입을 정확히 알고, 이에 맞는 제품을 찾아 꼭 필요한 제품 위주로 사용하기를 권합니다.” 김홍석 원장의 조언이다. 결국 스킨케어 단계나 화장품 성분의 개수보다는 어떤 제품을 선택해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