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마리끌레르> USA 뷰티 에디터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게 지켜 보는 메이크업 브랜드를 묻는 내용이었다. 번뜩 두 브랜드가 떠올랐다. 론칭한다는 사실만으로 업계를 술렁이게 한 구찌 뷰티와 골드 패키지부 터 아이덴티티를 오롯이 보여주는 돌체 앤 가바나 뷰티. ‘파격적이지만 잘 팔리는’ 컬렉션으로 구찌의 르네상스를 이끈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화장품을 만든다고? 구찌에서 화장품을 출시한다 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였지만, 립스틱으로 출사표를 던지며 남긴 그의 일성은 소름 돋게 멋졌다. “립스틱은 어떤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상징이자 아주 오래된 원초적 언어다. 이는 지워진 후에도 의도한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한다. 립스틱을 바르는 행위의 미학은 지우는 행위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돌체 앤 가바나 뷰티엔 남부 유럽 이 고스란히 담겼다. 패키지를 장식한 다마스크 패턴이나 시칠리아 레이스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컬러도 마찬가지. 강렬한 오렌지는 시칠리아섬의 탄제린, 청량한 블루는 지중해의 물빛에서 받은 영감을 표현했다. 두 브랜드의 고향은 모두 이탈리아다.

2020 F/W 패션위크 출장지로 망설임 없이 밀라노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솔직히 요즘 유행하는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의 원조 격 인 파리지엔 시크를 좇던 나(를 비롯한 한국 여자들)에게 극단적으로 선명하고 화려한 이탤리언 뷰티가 기분 좋은 자극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실제로 파리지엔 뷰티와 이탤리언 뷰티의 극명한 차이는 유럽 뷰티 유튜버들의 단골 콘텐츠기이도 하다.) 트렌드를 찾아내는 직업병을 가진 터라 출장 내내 이탈리아 현지 사람 들을 관찰했다. 패션위크 기간이니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느냐고? 밀라노 방문이 처음 인 나조차 단번에 현지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산이 또렷한 눈썹과 깔끔한 캐츠아이, 입술을 꽉 채워 바른 립스틱, 화룡점정으로 골드 주얼리까지 착용했다면 100% 이탤리언이었다.

꾸미고 가꾸는 스타일엔 삶의 방식이 녹아 있다. 밀라노에서 1년에 두 번 패션위크가 열리다 보니 이탈리아 사람들은 일단 유행에 민감하 다. 게다가 쿠튀르가 아닌 기성복 컬렉션이 주류라 일상에서 유행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췄다. 이번 시즌 뷰티 트렌드 중 하나가 ‘인조 속눈썹’인데, 실제로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 눈꺼풀이 무거울 정도로 인조 속눈썹을 길게 붙인 여자들을 여럿 마주쳤다. 그중 물건 값을 계 산해주던 한 점원에게 속눈썹이 무겁지 않으냐고 묻자 “유행이잖아. 무겁긴 한데 예쁘니까 괜찮아”라는 짜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컬렉션 백스테이지 룩이 일상이 되는 도시라니! <바다에 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에서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유행을 이끌기도 하고 좇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길에서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일삼던 이탈리아 젊은이들을 볼 수 없는 것 또한 그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트렌드를 기꺼이 즐기는 적극성은 역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 나리자’를 보자. 다빈치가 눈썹을 빼놓고 그린 게 아니라 당시 이마가 넓은 게 유행해 너도나도 눈썹을 밀었다는 일화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수세기 동안 눈썹의 유행이 얼마나 다변했으면 <눈썹의 역사>라는 뷰티 북도 출간됐다. 흔히 유럽 뷰티의 본거지를 프랑스로 생각하는데, 프랑스에 화장품을 들여온 사람은 16세기 피렌체 에서 번성하던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치다. 프랑스 왕실로 시집가며 이탈리아의 뷰티 트렌드를 ‘시월드’에 전파한 셈이다. 프랑스 브랜드 겔랑의 시그니처 제품인 메테오리트 파우더 역시 당시 카트린 드 메디치의 보석함에서 영감을 받아 고안한 제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