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3일 방영된 드라마 <사랑과 전쟁 2> 86회 ‘내 여자의 남자’. 아이돌 특집편으로 제국의 아이들의 문준영, 걸스데이의 유라, 그리고 제이워크의 장수원이 출연한 이 단막극 한 편이 1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네티즌과 시청자들이 두고두고 되새김질하는 ‘대박 에피소드’가 될 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다. 1999년에 처음 방송된 이래 15년간 계속된 이 드라마는 통속적인 이야기와 조정위원회 위원 역을 맡은 배우 신구의 대사이자 유행어가 된 ‘4주 후에 뵙겠습니다’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왔었다. 그런데 이날 방송 이후 드라마는 예상치 못한 주목을 받으며 새로운 유행어를 낳았다. 바로 이 남자, 장수원 때문이다.
1990년대 말 아이돌 가수 시대를 열어 젖힌 젝스키스의 멤버로서 귀공자 같은 외모로 소녀 팬들의 온갖 망상의 대상이었고, 2000년대 다른 멤버 김재덕과 결성한 2인조 그룹 제이워크로 무대 위에서 감성 짙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 그런 그가 데뷔 16년여 만에 처음으로 도전한 드라마, 그것도 치정으로 얽힌 상대방에게 절절하게 구애하는 역할을 맡아 물음표와 느낌표가 난무하는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정극에서, 일관성 있게 억양 없는 내레이션 톤과 경직된 몸짓을 보여준 것이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많이 놀랐죠.” “레포트 쓰다 잠들었다면서. 앞뒤가 안 맞잖아.” 드라마 속 대사 자체가 유행어가 되고, 방송 직후 수일간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 1위에서 그의 이름이 떠나지 않았을 정도로, 그의 팬이든 아니든, 드라마를 본 이들의 충격은 컸다. 그의 연기를 ‘로봇 연기’라며 비웃는 글이 인터넷 사방팔방에 넘쳐났다. 부족한 연기력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대중의 힐난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사자로서는 그 괴로움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16년 차 가수의 찌릿한 연기 데뷔 실패’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을 이야기는 뜻밖의 반전을 맞았다. 인터넷에서 그의 연기를 희화화한 유머 글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라디오스타>에 게스트로 출연한 장수원은 자신의 연기력에 대해 조용한 목소리로 ‘연습하지 않아도 몸에서 나오는 거다’라며 뻔뻔한 건지, 재치 있는 건지 모를 태도로 웃음을 선사하더니, ‘처음엔 힘들었지만 많은 분들이 즐거워하시니 괜찮은 것 같다’며 세상 초월한 듯한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초한 일이긴 하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수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신의 연기력 부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을 스스로 패러디하는 그의 스스럼없는 모습은 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일로 다시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 1위에 오른 이후로 그는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의 드라마 속 대사는 유행어가 되었고, CF 섭외가 들어왔으며, <SNL 코리아>에 연기력 출중한 배우 역할로 특별 출연하기까지 했다. 갈대 같은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은 그의 덤덤함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마침내 화보 촬영 현장에서 만난 그를 보고 든 생각은 이 모든 게 신의 한 수, 또는 영민하게 계산된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그의 우직함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가 막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생>을 패러디한 2부작 <미생물>의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퍼뜩 화제가 된 그의 로봇 연기를 다시 보게 되겠거니 했다. 하지만 막상 접한 <미생물>의 그는 <사랑과 전쟁 2>의 그 장수원이 아니었다. 갑자기 사회에 내던져져 모든 게 낯선 ‘장그래’로 분한 그는, 여전히 꽤 어색했지만 그건 서투른 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정말로 배역에 몰입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송을 보고 그의 연기가 너무 늘어 실망(?)했다는 사람들의 원망 섞인 반응도 제법 있었다.
“그래요? 그렇게 잘한 연기도 아닌데.(웃음) 사실 처음엔 일부러 예전처럼 연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촬영 며칠 전부터 그래도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을 바꿨죠. 어차피 <사랑과 전쟁 2>에서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온 거잖아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되 재미가 필요한 패러디물이니까 몇몇 장면에서만 어색한 느낌을 내는 정도로 하자고 마음먹었죠. 매 장면 촬영 들어가기 전에 원작인 <미생>의 장면을 돌려 보고 동선과 걸음걸이, 말투를 똑같이 흉내 내가며 연기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진도 모두요.”
“‘로봇 연기의 달인’이란 캐릭터로 재미있는 컨셉트의 CF도 찍고 새 드라마의 주연도 맡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이미지로 계속 밀고 나가는 건 오히려 식상해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여전히 재미있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기치 않게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지만, 사실은 채 스무 살도 되기 전 인기 절정의 아이돌 그룹 멤버로 정상에 섰던 그다. 그 광적인 열기가 가신 이후에는 한동안 활동을 쉬기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음악 활동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여유는 많은 것을 겪은 뒤 마침내 삶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게 된 결과인 듯했다.
“요새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 기분은 물론 좋죠. 그렇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 어느 순간 갑자기 꺼지는 건 아닌지 하는 건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랜 기간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 올라가기도 하고 바닥도 치고 다 해봤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잘된다고 무작정 좋지도 조급하지도 않고요. 물론 인기가 쭉 이어지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떨어질 걸 아니까 우쭐한 느낌도 없어요. 지금의 이런 변화가 제가 뭘 어떻게 바꾸려고 애써서 달라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제가 하던 대로 들어오는 일을 열심히 할 뿐이에요.”
<미생>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등장한 샤를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가 그의 내레이션으로 <미생물>의 마지막 신을 장식했다. ‘취하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런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를 지켜보고, 그를 직접 마주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학창 시절 데뷔해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기까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달고 쓴 맛을 모두 맛보면서도 그저 덤덤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뜻밖의 여정을 응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