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이 시작될 무렵, 이윤지는 대학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 국내 초연 작품이었던 3인극 <3일간의 비>는 1960년과 1995년, 30여 년의 시차를 두고 1995년에 발견된 일기장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클로저>에 이어 4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이윤지는 극에서 3명의 인물을 연기했고, 그 3명은 각각 결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연극 작품과 작품 사이 그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인생의 많은 변화를 겪었다. 때론 불안정하고 사랑 앞에서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던 <클로저>의 ‘앨리스’와 냉정하고 차분하며 뱉어내기보다는 참아내는 데 익숙한 <3일간의 비>의 ‘낸’은 이윤지가 생의 변곡점에서 만난 꽤 의미 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속내를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배우의 인생을 대하는 이윤지의 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일일 드라마 <행복을 주는 사람> 팀과 종방연을 한 다음 날 연극 리딩을 했어요. 몸은 무척 힘들었는데 막상 리딩을 하고 나니 ‘그래, 연극이 이런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작품을 놓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며 의견을 나누고, 게다가 국내 초연인 작품이어서 학생 때로 돌아가 공부하는 느낌도 들었죠. 드라마 촬영장에 갈 때는 설레기는 하지만 악몽을 꿀 만큼 걱정되지는 않아요. 그런데 공연은 달라요. 한번은 꿈에서 공연이 엉망이 되어서 무대에서 도망 나온 적도 있어요. 나 때문에 공연을 망친 터라 상대 배우들이 내게 막 화를 냈죠.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서 새벽에 일어나 문자 메시지를 뒤져볼 정도였어요.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하나의 작품을 한정된 시간동안 풀어내는 연극만의 특징은 드라마나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이에요. 헤어날 수 없는.” 이번 작품은 유독 팀워크도 좋아서 공연하는 날 서로 모니터링하며 대화하던 시간도 이윤지에게는 여전히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연극 무대는 자꾸만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 매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느낀다. “무대는 제게 시험대와 같아요. 드라마나 영화는 한 장면을 위해 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장면을 완성하지만 연극은 한 번 뱉어내면 끝이죠. 마주하는 관객도 매일 다르고요. 짧다면 짧은 시간에 기승전결이 모두 들어 있어요. 마치 뭔가를 시원하게 쏟아내는 기분이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게 결혼은 한순간에 여러 역할을 부여한다. 슈퍼우먼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타협을 해야 할 때도 있고 현명한 선택을 위한 부담을 져야 할 때도 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건, 있을 법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많은 여성이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나 책을 보면 푹 빠져요.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할까 봐 두려워 보지 못한 영화도 많아요. <82년생 김지영>은 지인에게 선물 받았어요. 책 속 주인공이 1982년생, 서른네 살의 결혼한 여자잖아요. 저도 지금 서른네 살이거든요. 그래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고 극 중 주인공의 남편과 제 남편 성이 같아 이상하게 더 심취하게 되더라고요. 결혼 전후의 삶이 같을 수는 없죠.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도 조금 바뀐 것 같아요. 가정과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20대의 이윤지는 쉬지 않고 연기를 하며 많은 작품으로 삶을 채워왔어요. 그러다 보니 작품을 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제 이윤지는 달라졌다. 빨리 가기보다는 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맞을 10년은 지난 10년과 좀 다르게 살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엄마가 된 이후에 여자 이윤지의 삶에만 새로운 기대를 한 건 아니에요. 배우 이윤지에 대한 기대도 있었죠. 그런 기대감이 있기에 이 가정에 주저 없이 뛰어든 것 같아요.” 배우의 세계라고 해서 여성에게 더 관대한 부분은 없다. 여성 배우는 남성 배우에 비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비교적 다양하지 않고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의 주제도 한정적이다.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더 많으면 좋겠어요. 배우가 아닌 관객이나 시청자 입장에서도요. 배우로서는 더 많은 여자들을 연기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죠. 다양한 여자를 연기하고 싶은 마음에 연기를 시작했으니 제가 연기할 수 있는 ‘여자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그 여자들을 연기할 때 오로지 진심만을 담고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어떤 좋은 배우 못지않게 그 진심을 잘 표현하고 싶죠. 이제 여자 이윤지를 너머 아내와 엄마 이윤지로 역할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으니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어요.”
배우로 한 편의 드라마와 한 편의 연극에 출연하며 2017년을 보낸 이윤지는 좀 더 담대해진 2018년의 자신을 기대한다. “세월이 흐르는 건 야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죠. 희로애락의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찾아오고 또 지나가니까요. 2018년에는 좀 더 담대해지고 싶어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종종걸음 걷지 않고 인생을 여유롭게 바라보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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