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의 고민
“사회 여러 층에서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줄을 잇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발전적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겠나. 오래된 문제라 하루아침에 달라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폭로가 피해자에게 최선의 자기표현 수단이며 극복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좋지 않은 일을 겪고도 지금껏 입밖에 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 털어놓았으면 한다.” 얼마 전 ‘미래의 여성지도자상’을 받은 배우 문소리는 수상 소감에서 영화계 성폭력을 비롯한 젠더 이슈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고민 중이라 밝혔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영화인들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제작사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와 임순례 감독은 영화판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든든’이라는 성폭력 상담 창구의 대표를 맡아 성폭력 피해 영화인과 함께 고민하고 업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배우로 20년 가까이 살아오며 이 업계가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여성 영화인뿐만 아니라 남성 영화인도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변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같은 여성으로 화가 나기도 하고 지금껏 방관한 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긴 시간을 배우로 살아왔기에 페미니즘이나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갖고 공부할 의지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영화와 함께해온 삶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나를 성장하게 해주었으며, 즐거움을 주었다. 배우로 살아오며 연기를 통해 경제적 보상과 성취감을 얻은 것 외에도 삶에 관해 여러 가지를 배웠고, 그러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도 했다. 내 인생은 연기 활동으로 조금씩 성장해온 셈이다. 어쩌면 그저 운명일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배우의 세계에 발 디딘 초반에는 지금만큼의 부담감이나 책임감은 없었지만 오히려 여성이라 느끼는 두려움이 컸다. “두려움을 안고 일하면 에너지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이 세계에 막 진입한 배우들이 두려움으로 소진하는 에너지를 오롯이 연기에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찌어찌 지금껏 잘 헤쳐왔지만 그렇게 끝낼 문제가 아니다. 이제 중견 영화인의 자녀들이 부모의 뒤를 이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딸을 가진 엄마로 젠더에 대한 고민의 폭을 나와 내 주변인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 고민이 더 나은 앞날을 위해 다음 세대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한두 사람의 전사 혹은 혁명가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변화란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쇼 비즈니스 업계는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속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 업계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서류로 업무상의 전달을 하고, 퇴근하면 각자의 삶이 있는 직종과는 다르다. 촬영이 끝나고 주변의 누군가와 술을 한잔 할 수도 있고 작업실에서 만나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범죄 행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북유럽에서는 영화를 제작할 때 참여하는 여성 영화인 수를 쿼터제로 보장하고 영화마다 젠더 감수성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유럽에 비해 젠더 이슈를 둘러싼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 그나마 희망적인 점은 유럽에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독일의 페미니스트가 쓴 책을 읽었는데 30년 전의 독일 사회는 젠더적 관점에서 상상 이상으로 구시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독일에 살고 있는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나라는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독일도 지금의 변화를 이룬 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물론 사회가 쉽게 변하진 않겠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의지가 모이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열심히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할 때다. 그러다 보면 내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훨씬 나아져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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