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오랫동안 젠더로 구분되어온 세상의 단단한 편견에 균열이 나기를 기대한다’라는
바람으로 시작한 젠더프리 프로젝트가 어느덧 일곱 번째 여정을 맞았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성별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여성 배우들은 각자의 힘을 보태왔다.

변화의 조짐을 발견해 설렐 때도, 정체되는 것 같아 막막할 때도, 이 걸음이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매해 함께하는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을 동력 삼아 2024년의 마리끌레르 젠더프리는 8인의 배우와 힘차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우리의 걸음이 보다 넓고 다양한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경계 너머로

옥자연

시퀸 슬릿 드레스 maje.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 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이다”

연극 <맥베스> 맥베스 役

카고 베스트 H&M, 데님 팬츠 Loewe, 샌들 힐 Jimmy Choo, 이어링과 링 모두 Hei.

연극 <맥베스>의 5막 5장 속 한 장면을 연기했다.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 맥베스가 남긴 독백이다. 작년 말부터 어떻게 살아야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초심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작품 전체를 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느끼던 차에 크게 와닿은 대사다.

매년 꾸준히 한두편의 연극 작품에 참여하고 있다. 연극이라는 장르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가 있나?

카메라 앞에서는 배우에게 각자만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연극은 함께하는 배우들과 동시에 연기하며 작품에 녹아들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또 연극은 성별이나 나이의 경계를 넘나들기 굉장히 편한 분야이기도 하다. 극 안에서 약속만 한다면 내가 세 살짜리 아이를 연기할 수도 있고, 중년 남성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연극계에서는 젠더프리가 화두가 된 지 오래고, 어느 분야보다도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배우로서 힘을 얻는다.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인가?

드라마 <마인>의 ‘강자경’과 의 ‘민수’ 등 지나온 캐릭터들을 모두 아끼지만 제일 애착이 가는 인물은 역시 영화 <사랑의 고고학>의 ‘영실’이다. 영화는 영실이 연인 ‘인식(기윤)’과의 뒤틀린 관계를 지속하다 끝내 이별에 이르는 길고도 지난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품이 조명하는 10년에 가까운 시간만큼 나 역시 영실의 삶을 살아본 셈이니 그 인물의 면면이 내 삶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가장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이다.

여성 창작자의 작품 중 최근 인상 깊게 본 작품이 있다면?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장거리 수영의 전설적인 인물인 다이애나 나이애드가 60세 생일을 맞아 1백10마일에 달하는 바다를 헤엄쳐 종단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멋지게 나이 든 두 여성 배우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배우가 작품 안팎에서 한 인간으로서 건강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누군가에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향후 몇 년간 계속 떠올릴 작품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큰 위안을 얻었다.

연기 또한 자신의 일부를 꺼내보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매순간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나?

그 용기는 어쩌면 내게서 나오는 거라기보다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들과 작품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작년 말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에 참여했는데, 참사를 다루는 극이기에 윤리적으로 잘 그려내기 위해 배우들이 다 같이 무겁게 고민했다. 연극을 보고 난 뒤 친한 감독님이 “관객과 배우 사이에 삼투압이 일어난 것 같다”는 말을 해줬는데, 그 표현이 굉장히 와닿았다. 진심을 다해 극을 이해하고 무대를 올리는 과정에서 나 역시 관객과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순간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용기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요즘은 어떤 서사에 관심을 두나?

작품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할 만한 중요한 이야기 인가’다. 요즘은 서로 극명하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분열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서로 적대하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두 세계가 만나는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살곤 하지 않나. 내 세계 너머로 확장되어가는 이야기가 줄 수 있는 위로가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