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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이상향으로 만들어가는 멋진 세계

소소하게 블로그를 하고 있다. 내가 올리는 글이나 음악에 댓글을 유난히 많이 다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블로그에 몇 번 들어가봤지만 별 다른 포스팅이 없는 유령 블로그였다. 얼마 전 나는 블로그 내용을 엮어 책을 출판했다. 한동안 댓글 창에서 안 보이던 그녀가 내가 낸 책의 주제에 관해 궁금한 것이 많다며 만남을 요청했다. 마침 사는 곳도 가까워 둘 다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여행사를 다니는 평범한 여직원. 그녀를 보자마자 든 첫 느낌이었다. 살집이 약간 있는 체형에 웃는 얼굴이 시원시원한. 내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그녀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나와 내 블로그에 관한 감정과 감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던 그녀는 나만큼이나 하고 싶은 일, 방향,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흥미가 생겼다. 음악, 영화, 삶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하고 헤어진 그날 이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정신적 교감을 매개로 한 연애는 ‘외모지상주의자’라고 큰소리치고 다니던 과거가 부끄러울 정도로 내게 신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_C, 음반사 마케팅

 

손끝에서 전해지는 육감적인 느낌

후배가 술자리에 친구를 데려왔다. 평범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았다.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가 큰, 굳이 따지면 남미 여자 같은 얼굴이었는데 남미 여자들처럼 몸매가 좋거나 하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땐 여러 명이 어울렸기 때문에 나는 후배와 이야기하느라 그 친구가 인상에 남지 않았다. 다음번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는 감정 표현의 폭이 크다고 해야 할까, 목젖이 보이도록 웃고, 말할 때마다 다이내믹하게 바뀌는 표정에 눈이 자꾸 갔다.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그 친구가 우연히 내 팔을 잡았는데 그 터치에 묘하게 섹시한 기운이 있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말하자면 꽤 육감적인 느낌이었다. 남자는 시각의 동물이다. 시각적으로 강렬한 ‘남미스러움’과 터치의 ‘스르르’한 기운 그리고 다이내믹한 표정과 미소가 더해진 순간 나는 그 친구에게 확 빠져들었다. 옷을 특별히 짧게 입은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못 입은 편인데도 왠지 모르게 한국인이 아닌 정말로 남미 사람처럼 보였다. 알코올이 약간의 영향을 미쳤으나 취할 만큼 마시진 않았다. 주량이 소주 두 병은 되는데 그땐 겨우 소주 반병 정도를 마셨을 뿐이니까. 이후 ‘술 마시기 좋은 친구’라는 명목으로 자주 술자리를 함께했지만 사실은 그 친구가 매력적이라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_L, 출판사 편집팀

 

편안함이라는 무시무시한 덫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친한 동생이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거절하는 건 죄악이라 생각했다. 시험만 끝나면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고 어딜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녀와 설렁설렁 연애를 시작했다. 관계의 우위는 자연스레 내가 선점했으므로 나는 별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그녀를 만났다. 그게 화근이었다. 특별한 노력이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는 그녀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시험이 끝났을 땐 그 편안함에 사로잡혀 헤어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밋밋하기만한 얼굴에서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빛나는 머릿결이 두드러져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알던 여자들과 다른 바르고 성실한 모습을 보며, 이런 애라면 결혼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녀이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어졌는지, 갑자기 결혼 욕구가 생겼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헤어졌다. 내 위주로 돌아가던 관계에 그녀가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났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다음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_P, 포토그래퍼

 

모두가 나를 멋있다고 할 때

솔직히 말해 나는 키 크고 잘생겼다. 처음 만나는 여자들은 대부분 동공이 불안해지거나 반대로 도도한 척하며 흔들리는 감정선을 드러낸다. 그런데 아주 가끔 나의 잘생긴 외모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여자들을 만난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30년 넘게 살아온 경험에서 쌓인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전 직장의 팀장은 나를 말 그대로 ‘소 닭 보듯’ 했다. 그녀는 <또! 오해영>의 ‘예쁜 오해영’처럼 미모의 커리어우먼도 아니었고 너무나 평범한, 스쳐 지나가도 풍경으로만 남을 사람이었다. ‘뭐지?’ 하는 기분이 점차 호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그녀의 남자친구는 화가라는데 제도권의 사생아로 살아온 나는 묘한 열등감이랄까, 승부욕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팀 회식 때도, 체육대회 때도 팀장 옆에 바싹 붙어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결과는 대실패. 처음부터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눈에 무언가를 억지로 보여주는 건 그걸 더 하찮아 보이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 그녀의 인스타그램엔 남자친구의 화실을 배경으로 한 스몰 웨딩 사진이 올라왔다. ‘영혼의 단짝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_K, 금융설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