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mcmalimk13_01함부로 집 비우지 마세요

내가 막 연애에 눈뜰 무렵 서른세 살 아저씨와 결혼식을 올려버린 D는 늘 어른처럼 느껴졌었다. 남편은 사업 때문에 출장이 잦았는데 결혼한 지 5년 정도 됐을 무렵 외로움에 지친 D는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얼굴은 더 예뻐졌고 돈과 시간은 넘쳐났다. 일탈은 유부녀인 줄 알 리 없는 남자들이 거는 수작을 하나 둘 받아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곧 D는 미팅을 나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출장 간 사이 그렇게 알게 된 남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마흔을 앞둔 바쁜 사업가로 사는 지 오래였다.

일탈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남편이 불륜의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둘은 이혼했다. 사실 나와 내 친구들은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안됐네’ 하곤 그걸로 끝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 관계가 복잡했던 친구는 남자 관계에 신경 쓰느라 우리와의 우정엔 크게 마음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많던 돈은 철저히 남자만의 것이었고, D는 서른을 앞둔 지금 빈털터리 이혼녀가 되어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한창 놀 때 만나던 친구들도 돈과 집을 잃은 D의 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종종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D의 소식을 전해 들을 뿐이다. _E, L전자 물류팀

 

권태와 일탈 사이

스무 살 때 처음 들어가 살던 하숙집 딸 A는 지금 나의 단짝이다. 그녀는 그 시절 만난 두 살 터울 남자친구와 9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다. 파티시에로 일하던 친구는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남편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꽃꽂이를 배우거나 운동을 하거나 나를 만나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야, 걔가 밖에서 보재.” ‘걔’는 친구가 다니던 헬스클럽의 퍼스널 트레이너였다. 몇 번 나에게 트레이너가 잘생겼더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긴 했지만 10년 가까이 A의 연애를 지켜보는 동안 그녀가 남자친구가 아닌 다른 남자 얘길 하는 게 한두 번이었을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화근이었다. 트레이너와 따로 두 번째 만난 날 이후 친구의 마음은 그에게 완전히 갇혀버렸다. 다그쳐도 보고 회유도 해봤지만 지금 그녀는 그 트레이너와 3년째 열애 중이다. 친구의 집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이상한 건 남편 역시 A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딱히 알려고 채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은 사람이 나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연락하고 지내던 그를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나 접한 지 꽤 됐다. _Y, 학원 강사

 

아무리 사랑이 전부라지만

술을 마시다 B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C선배가 점점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다고. C선배는 우리 모임 멤버 중 한 명이자 그녀의 회사 직속 선배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다. 우린 선배 결혼식에도 같이 갔었다. 솔직히 나는 선배가 친구에게 품은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잔뜩 술에 취해 나와 둘만 남았을 때 ‘B는 자신의 뮤즈’라며 B에 대한 예찬을 마구 늘어놓았었다. 자기가 무슨 아티스트도 아니고 뮤즈를 운운하는 게 웃겨 콧방귀를 뀌며 넘겼지만 석연찮은 구석은 분명 있었다. 그 마음이 달덩이처럼 커져 B에게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둘은 그가 아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오피스 부부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B의 말에 까무러쳤다. “나도 선배를 좋아하려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뭐야. 구리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같이 좋아했으면 ‘불륜’이라는 가십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애초에 마음이 없었는데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자마자 그를 좋아할 수 있다니. 곤경에 빠진 듯 털어놓는 B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다가 나는 결국 한마디하고 말았다. 그 가벼운 마음 하나로 선배의 아내는 여자로서 얼마나 괴로운 일을 맞닥뜨릴지 생각해봤느냐고.

B는 평소 인생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저 말을 뱉을 때 역시 자기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기에 그의 사랑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였다. 평소 B의 뚜렷한 가치관을 존중해왔지만 이런 식으로 가치관을 지키는 건 조금도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B와 나는 안부만 확인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후회는 없다. 둘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적어도 어떤 게 ‘구리지 않은지’ 아는 사람이 왜 이렇게 드문 걸까? _K, 출판사 편집팀

 

한 사람이 떠난 자리

친한 형의 여자친구는 꽤 예뻤다. 나도 종종 형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녀를 훔쳐보곤 했는데 예쁜 애들이야 널렸지만 그녀는 명문대 출신에 책 읽는 걸 좋아해 자신만의 세계도 분명했다. 키가 커서 모델 일도 종종 했었는데 형과 그녀의 세계관이 맞아 둘이 누구보다 재밌고 바람직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그녀는 이 형을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둘이 헤어졌고 그 이유는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소설가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 대체 그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그녀가 전화로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형은 이성을 잃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화도 냈다가 달래도 봤다가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아침드라마 대사 같은 말까지 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미안해. 오빠 같은 사람 다신 못 만날 거 알아. 근데 내가 이 작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 난 지금 매일이 꿈 같고 믿기지 않아”였단다. 형을 오랫동안 봐왔지만 우는 모습도 처음 봤고, 사람이 그렇게 많이 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형은 몇 달을 폐인처럼 살았다. 밤마다 그녀의 친구에게 전화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물었고 그 끝은 늘 전화를 받은 친구와 함께 목 놓아 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폐인으로 지냈다. 옆에서 보는 친구와 지인들은 그 괴로움을 함께 감당하며 차츰 그녀를 한마음으로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는 그 형을 통해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과 등을 진 채 인스타그램도 ‘계폭’한 후 사라졌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_A,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