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KE T.T
대한민국 30대 남자라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 우연히 마주칠수록 좋은 것. 라디오에서 우연히, 티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치면 무조건 귀가 뚫리고 눈이 커지는 것. 바로 아이돌 음악이다. 평소 출근할 때도 아이돌 음악을 들으며 저혈압을 평균치로 상승시키곤 하는 내 이런 취향을 여자친구도 물론 모르지 않았다. 참고로 여자친구는 나보다 더 신나게 트와이스의 ‘TT’ 춤까지 따라 추는 그런 여자다.
그런데 내 생일이 다가오면서 여자친구의 낌새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생일 당일. 어설픈 솜씨로 생일상을 차려준 여자친구가 잔뜩 부푼 표정으로 선물을 건넸다. 트와이스의 사인 CD였다. 여자친구네 회사 대표가 받아다 줬단다. 사실 난 그것 말고도 다른 선물이 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일상을 포함해 그게 다였다. ‘아이돌 음악을 즐겨 듣는 건 맞지만 생일 선물로까지 그걸 받고 싶진 않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누굴 탓하랴. 서른세 번째 생일 선물이 트와이스 사인 CD라니. 조금 울고 싶어졌다. _D, 학원 강사(33세)
아무리 빈티지를 좋아한다지만
여자친구와 난 1990년대의 무드를 사랑한다. 오래된 디자인의 가죽 재킷, 하이웨이스트 청바지 등을 뒤적거릴 수 있는 빈티지숍 방문을 좋아하고, 플레이리스트에는 언제 나 듀스와 김성재, 우탱클랜과 나스가 있다. 여자친구와 사귄 지 1주년이 됐을 때 우리는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90년대를 컨셉트로 잡고 친구들을 모아 1주년 기념 파티를 하기로 했다. 모두 힙합 바지, 공주 티셔츠 같은 옷을 입고 반다나 등의 소품을 착용하고 모였다. 심지어 옛날식 버터크림 케이크까지 준비한 BACK TO 90’S 파티는 완벽한 성공인 듯했다.
드디어 선물 교환식. 나는 여자친구가 최근에 꽂힌 주얼리 브랜드에서 그녀의 이니셜을 새긴 팔찌를 준비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것은 ‘학알’이다. 학알이 뭔지 아시는지? 종이학처럼 종이로 접은 알이다. 종이학의 알, 학알. 유리병에 학알 3백7개가 들어 있었다. (3백65개에 맞추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최근에 학알을 선물로 받아본 사람만이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학알의 신기한 능력은 그걸 어디에 두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웃픈 헤프닝으로 끝난 며칠 뒤 우연히 여자친구의 휴대폰을 슬쩍 넘겨 봤다. 최근 검색어에 ‘학알 접는 법’, ‘거북이 알 접는 법’이 있었다. 얘랑은 절대 헤어지지 말아야지. _K, 광고 회사 AD(31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친구 생일 파티였다. 3차로 클럽에 갔다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내 전화번호를 받았고 이틀 동안 연락을 나누다가 주말이 되어 만나기로 했다. 클럽 밖에서 만난 그 여자는 어두운 곳에서 봤을 때보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예쁘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술을 마시기로 하고 자리를 옮겼는데 그녀가 갑자기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시집 선물해주는 걸 좋아해서요.” 라면서 그녀가 건넨 시집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_S, 영화 마케터(32세)
이러려고 저축했나 자괴감 들어
평소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카메라 욕심도 많은데 오랜만에 정말 갖고 싶은 카메라가 생겼다. 내 한 달 월급에서 10만원 정도 뺀 금액과 맞먹을 만큼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워낙 구하기 힘든 기종이라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에 먹고 입고 타는 걸 줄여가며 나만의 ‘카메라 적금’을 시작한 지 두 달쯤 됐을 때다. 만난 지 6개월 된 여자친구가 내 스마트폰 캘린더를 뒤적이다가 ‘적금 타는 날’이라고 써놓은 걸 보더니 적금을 타서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나는 신이 나서 사고 싶은 카메라 사진을 보여주며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뒤인 밸런타인데이. 일하는 곳으로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열어보니 적금 타서 사려고 한 그 카메라였다. 순간 기쁘다기보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참아가며 통장에 80만원을 모아둔 사실이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손에 들어온 카메라가 더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좀 꼬인 걸까? 여태껏 받아본 선물 중 가장 센스 없는 선물이었다._J, 포토그래퍼 어시스턴트(28세)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것
향만큼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타는 물건이 있을까? 아무리 비싼 향의 캔들이나 향수라 해도 좋아하는 향이 아니면 그것만큼 예쁜 쓰레기가 없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바란 센스는 이 정도다. 나의 향 취향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향을 선물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정도의 센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만난 지 1백 일 기념으로 그녀가 준비한 선물은 본드넘버나인의 향수였다. 그 브랜드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고 많은 향 중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골라 고이 포장해온 그녀는 “자기 취향이 워낙 까다로워서 고르느라 혼났어”라고 말하면서 교환의 희망을 선택지에서 없애버렸다. 심지어 만날 때마다 “내가 준 향수 왜 안 뿌렸어?”라고 묻는 통에 세 번에 한 번은 싫어하는 그 향을 뿌려야 했다. 그녀와 헤어진 지금, 윗부분만 약간 줄어든 그 향수는 아직도 현관 앞에 놓여 있다. _T, 디자이너(3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