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내가 키웠다
5년간 사귀었던 E와 나는 캠퍼스 커플로 시작했다. 갓 스물에 만났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사귀었다기보다 함께 성장했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지금이야 거듭된 경험으로 센스 있는 남자를 알아보는 눈이 생겼지만 돌이켜보면 E는 3형제 중 막내인 탓인지 연애를 떠나 그냥 사는 데 손이 많이 가는 애였다. 한번은 늘 안경을 쓰고 다니는 E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나타났다. 안경을 문신처럼 여기던 애라 렌즈를 맞췄을 일도 없고 가까이 올수록 눈살을 찡그리길래 안경 어쨌느냐고 물어보니 아침에 급하게 일어나다가 밟아서 부러뜨렸다는 것이다. “그럼 안경을 새로 맞춰야지!” 했더니 알바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안경 맞출 돈이 없단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잡고 안경점에 가서 그가 쓰던 안경보다 더 좋은 안경을 맞춰줬다. 자취방에 가보면 한겨울에 홑이불을 덮고 있고, 한여름에 아직도 극세사를 덮고 있는 그런 애였다. 만나는 5년 동안 그의 집에 가서 이불을 갈아주는 게 내 연례행사였다. 결국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우리는 졸업 후 헤어졌다. 궁금할 때마다 E의 페이스북에 들어가보는데 라식 수술을 했는지 이젠 안경도 끼지 않고 약간은 훈훈한 외모로 나보다 어린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E를 완성형으로 만들어놓은 게 나란 걸 그 여자가 알라나 몰라. _E(32세, 약사
나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친한 형이 다섯 살 어린 여자친구 D를 사귄다는 말을 처음 했을 때 형은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심지어 그녀의 직업은 비서. 몇달 후 형은 D를 데리고 모임에 나왔고 귀여운 외모에 붙임성 좋은 D는 나이답지 않게 금방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런데 둘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D는 형이 무슨 말을 하던 중간에 말을 끊고 정정하거나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얼마 전에 함께 태국을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과 떠난 여행이 형의 첫 해외여행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내가 많이 데리고 다녀야지. 대체 나 만나기 전에는 이 사람 뭐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덧붙여 D는 둘이 묵기로 한 호텔에 메일을 보내 신혼여행을 간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호텔에서 신혼부부에게만 주는 특별 혜택을 모두 챙겼다는 걸 대단히 자랑스럽게 말했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죠.” 자신의 알뜰함에 도취된 D 옆에서 형은 침묵했다. 얼마 전 카톡에 올라온 최신 소식으로는 D가 형의 성격상 회사 재무장부를 제대로 관리하고 있지 않을 것 같다며 이제부터 모든 장부 정리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손안의 아들처럼 남자친구를 쥐락펴락하려는 D를 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임의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_A(33세, 제품 디자이너
우렁각시 실재설
내가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노량진에 갔을 때다. 머리를 삭발하고 휴대전화도 정지하는 등 포부와 다짐이 꽤 대단했다. 우리는 만나는 날도 한 달에 두 번으로 정했고 나는 수업과 자습을 마친 늦은 밤에만 와이파이가 되는 고시원에 들어와 그녀와 연락을 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나. 여느 때와 같이 종일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고시원에 들어왔는데 평소라면 티셔츠와 추리닝이 엉망으로 널려 있을 침대가 이상하게 깨끗했다. 침대 머리맡에 붙은 쪽지를 보고서야 여자친구가 다녀갔다는 걸 알게 됐다. 고마움과 사랑이 마구 샘솟았다. 이후부터 여자친구는 갑작스럽고 비정기적으로 고시원을 오가기 시작했다. 공용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주고 갈 때까지는 고마웠다. 어느 날 입기 편하도록 일부러 자주 손을 뻗는 곳에 둔 추리닝이 도저히 안 보여서 물어보니 “아~그거 엉덩이랑 무릎이 너무 늘어나서 나오면서 버렸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짜증이 확 났다. 왜 남의 물건을 묻지도 않고 버리는가. 결정적인 것은 속옷 사건이다. 속옷이 한 벌 빼고 다 없어져서 여자친구에게 물어보니 속옷은 주기적으로 삶아줘야 한다며 전부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지금쯤은 속옷을 삶아주는 걸 기쁘게 생각하는 남자를 만났기를 바란다. _A(35세, 회계사)
자소서 써주는 여자
C는 서른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친구로서 한심해 보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C를 삶의 야망이 남들에 비해 크지 않은 사람 정도로 생각한다. 그에겐 4년간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 B가 있다. 잘나가는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인 B는 치열한 직업 환경만큼 자신의 삶 역시 치열하게 가꾸는 여자다. 연애 초창기, B는 일하는 틈틈이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C가 잘할 것 같은 일의 직군에서 사람을 뽑는지 체크하고 그중 몇 가지를 추려 C에게 전달했다. C는 건성으로 대답만 하고 B가 준 것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고 나에게만 슬쩍 전했다. 남자친구의 꿈쩍 않는 낌새를 알아차린 B는 데이트하는 날 노트북 앞에 C를 앉히고 구인 중인 회사 웹사이트에 접속하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써온 자소서를 B에게 전달했다. 이런 일은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얼핏 부딪히는 것처럼 보이는 둘이 어떻게 4년이나 만날 수 있었는지 물으면 핵심은 B의 태도에 있다고 답할 수 있다. B는 이 모든 과정을 인내심 강한 엄마처럼 신경질 한번 내지 않으며 해냈고 행여나 남자친구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봐 최소한의 닦달만으로 어르고 달랬다. C는 아직도 구직 중이다. 갈수록 C의 의지가 분명 해지는 것이 취직이 아닌 B와의 결혼이라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_M(31세,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