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으로 시끄러운 나날이었다. 사람들은 영화보다 뉴스에 더 눈을 돌렸고 주말이면 광장으로 나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예술은 검열당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예술, 좋은 영화 한 편이라는 것을 마리끌레르는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기꺼운 마음으로 여섯 번째 축제를 열기로 했다. 제6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예매가 시작된 날, 티켓 오픈과 동시에 이어진 매진 사례는 우리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켰다.
3월 2일부터 5일까지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총 34편의 영화가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이름으로 상영됐다. 모두 조만간 개봉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개봉한 영화들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들의 상영이 의미 있는 것은 이번 영화제가 편향성이 심한 국내 극장가에서 상대적으로 관객을 만날 기회가 적은 영화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알찬 라인업으로 내실을 다진 제6회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럭셔리 코스메틱 브랜드 겔랑, 모엣&샹동 샴페인, 캘리포니아 아몬드 협회의 후원으로 오랜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완벽히 마쳤다. 캐주얼한 조명 아래 빠른 템포의 음악을 배경으로 정해진 좌석 없이 진행된 개막식. 오른쪽에는 배우 권해효가, 입구에서는 배우 오광록이 후배, 동료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벌써 네 차례 사회를 맡은 배우 이윤지가 올해도 매끄럽게 공식적인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마리끌레르 손기연 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영화인연대회의 이춘연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그는 “관심이나 이익을 바라면서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면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라는 말로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진정성을 되짚었다.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첫 시상 순서는 올해 눈에 띈 신인배우에게 수여하는 루키 상. 박찬욱 감독이 시상자로 나서자 수상의 영광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극 중 ‘히데코’의 취향과 욕망을 바탕으로, 그녀가 한눈에 반할 만한 사람을 뽑았는데 그 대가가 참 혹독하다는 농담으로 입을 뗀 박찬욱 감독은 이어서 수상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21세기 한국은 시민으로서는 살기 힘든 환경이지만 예술가에게, 특히 배우에게는 축복과 같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앞으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광장에 가서 이것저것 깨닫게 되는 것을 양분 삼아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기를 기원하면서 발표하겠습니다.”
수상자는 <아가씨>의 김태리였다. 박찬욱 감독의 귀한 조언에 응답하듯 김태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길고 신중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안성기 배우와 정지영 감독의 눈에 후배를 향한 따뜻함과 훈훈함이 내내 서렸다.
이어진 부문은 올해 처음 생긴 마리끌레르 상. 패션과 뷰티뿐만 아니라 여성의 라이프스타일과 삶도 진지하게 고민해온 마리끌레르가 여성 영화인들을 응원하는 의미로 만든 부문이다. 첫 수상의 영예는 <연애담>의 이현주 감독에게 돌아갔다. <연애담>은 국내 여성 퀴어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많은 응원 속에서 다신 없을 순간처럼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현주 감독은 열연을 펼쳐준 이상희, 류선영 배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포토월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감독과 함께 개막식을 찾은 두 배우 역시 멀찍이서 환한 미소와 박수로 수상을 축하했다.
시상식이 진행될수록 무대를 향한 집중도는 더욱 높아졌다. 남은 부문은 특별상과 파이오니어 상. 정지영 감독이 시상한 특별상은 <가려진 시간> 팀에게 돌아갔다. 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은 2014년의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른손이앤에이의 곽신애 대표와 함께 무대에 오른 엄태화 감독은 “앞으로도 흥행에 연연하기보다는 칭찬받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올 한 해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며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상이자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파이오니어 상의 시상은 안성기가 맡았다. 단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제는 불러주지 않으면 마음이 덜컥할 것 같다며 마리끌레르 영화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그는 이어 수상할 배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한결같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봤을 때나 나중에 봤을 때나 한결같은 그 사람의 모습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 배우는 제가 보기에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감사하고 저는 같이하고 싶은 배우 영순위인데, 이 배우도 그럴지 이럴 때 압력을 넣어봅니다.” 덕분에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자연스레 수상자인 <아수라>의 정우성을 향해 옮겨갔다.
무대에 오른 정우성은 ‘개척자’라는 상의 이름이 거창하지만 돌이켜보면 ‘누구 같은 배우가 돼야지’가 아니라 ‘정우성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나다운 게 뭔지 고민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며 그런 의미에서 받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웃음지었다. 이어 이 시대의 진정한 개척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닐까 한다며 묵직하고 오래도록 기억될 소감을 전했다.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에 이어 <아수라>까지 정우성과 많은 작품을 함께 한 김성수 감독 역시 무대 올라 간단한 소감을 밝혔다.
마리끌레르 영화제 오동진 집행위원장의 마무리 인사로 개막식은 막을 내렸다. 식이 끝났음에도 많은 배우와 감독들은 샴페인을 손에 들고 못다 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담소는 뒤풀이 장소로까지 이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의 해운대 포장마차를 방불케 하며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찬 테이블에는 크고 작은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마리끌레르 영화제와 함께한 밤을 추억으로 수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