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벨
아내와 나는 10년 전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가 딱히 단골은 아니었는데 하루에도 수십 명이 들락거리는 카페에서 감각적인 옷차림과 남다른 헤어스타일이 인상에 깊이 남았는지 두 번째 왔을 때부터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주문을 받으러 갔을 때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봤는데 그것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잡지와 사진을 오려 붙인 아트 북 같은 것이었는데, 커다란 데이비드 보위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데이비드 보위 광팬인 나는 “데이비드 보위 좋아하시나 봐요” 하고 말을 건넸고 그게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예인으로 데뷔해보라는 제의도 적지 않게 받았던 내가 그녀와 다니기 시작하자 우리를 둘러싸고 좋지 않은 말들이 돌았다. 심지어 나와 그녀가 연인 사이인 것을 알면서도 내게 접근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미대를 다녔지만 학교에 흥미를 붙이지 못해 휴학하고 카페와 모델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던 나는 그녀를 만나 내가 갈망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취향도 그녀 덕분에 고유의 결을 가지게 되었다. 얼굴 예쁜 여자야 널리지 않았나. 얼굴보다는 나만의 유일한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부터 결혼한 지 4년이 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내게 아내만큼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Z, 34세, 쇼핑몰 운영자)
가스통이 된 기분
사업을 시작하고 밤낮으로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어느새 15kg이나 살이 쪄 있었다. 특단의 조치로 들어간 자전거 동호회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큰 키와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털털한 성격까지. 당연히 나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고 두 달을 그녀 곁에서 맴돌았다. 겨우 용기를 쥐어짜 한 고백을 그녀가 받아준 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동호회 사람들은 우리 둘이 사귄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동호회에 소속된 모든 남자의 로망이었고 그들은 나를 라이벌로 여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친구들은 우리를 보고 <미녀와 야수>의 실사판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거의 매일 만났지만 헤어질 때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첫사랑인가 싶게 낯선 기분에 휩싸여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주위에서는 그녀를 두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확실한 직업이 없다는 점과 잊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연 애는 1백 일을 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녀는 잊지 못하던 남자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그녀에게 나는 스쳐간 사람으로, 나에게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으로 남았다. 그 남자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친구들의 말대로 미녀와 야수가 될 수 있었을까? (K, 37세, 앱 개발자)
야수의 탈을 쓴 미녀
‘예쁘다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던 한 연예인의 말을 나는 평생 이해하지 못한다. 살면서 예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얼굴보다는 그나마 몸매가, 몸매보다는 성격이 더 자신 있으니까. 내가 처음 연애를 한 건 열일곱 살 때였다. 외모에 한창 예민한 시절, 나를 좋아할 남자는 평생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남자는 무조건 꼭 잡고 사귀 고 봤다. ‘내 주제에 이 정도 남자는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독이었다. 그런 내 삶이 반전을 맞은 건 서른 살 때였 다. ‘죽을힘을 다했다’는 말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매달리던 남자에게 처참히 차인 그날. ‘인간관계라는 것이 조르고 설득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큰 깨달음을 득도라도 하듯 불현듯 얻었다. 이후부터 누구를 만나면 일단 반 정도 포기하고 대했다. ‘네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고민 많은 한낱 미물일 뿐이지.’ 그렇게 지내길 2년, 지금 나는 세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연하남, 조금이라도 어릴 때 많이 만나보고 싶은 네 맘을 이해 하니 기다리겠다는 연상남, 오랜 시간 옆에 있어준 이성 친구. 내가 그렇듯 그 셋 모두 나를 어장 속 많은 여자 중 하나 로 여긴다 해도 크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는다. 온몸으로 부딪혀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찾은 여자로서의 자존감. 이 것만으로 난 지금 아주 살맛 나니 말이다. (A, 32세, 학원 강사)
우리가 우리인 이유
“안녕하세요. 항상 지켜보다가 쪽지 드립니다. 너무 아름다우신데 남자친구 분보다 더 멋진 사람 만나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으세요? 제 인스타 한번 와보시면….” 농담 같지만 하루 에 이런 DM을 서너 개는 받는다. 네가 여자친구가 없는 건 이런 쪽지를 보내는 지질함과 한심함 때문이야! 쏴주고 싶지만 코웃음 치고 넘어간다. 우리 커플을 보는 이런 시선에 이제는 익숙하니까. 우리는 둘이 공통으로 아는 친구의 사업을 돕기 위해 나는 모델로, 남자친구는 사진가로 처음 만났다. 남자친구의 첫인상은 그냥 곰 푸우 같았다. 나보다 키도 작고 뚱뚱한데 생글생글 웃기는 또 잘 웃고, 그 와중에 매너는 어찌나 좋은지. 아마추어 사진가랍시고 낡은 모텔 같은 걸 빌려서 촬영하자며 수작 거는 양아치들과 비교가 됐다. 선한 사람 같았다. 친구를 통해 먼저 연락을 한 건 나다. 사진가인 내 남자친구는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 민다. 화장을 안 하면 집 앞 슈퍼도 나가지 않던 내가 남자친구 덕분에 꾸미지 않아도 내게서 아름다운 모습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막 잠에서 깨어났거나 씻으려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거나 하품을 하는 내 모습이 가득하다. 여자친구의 이런 모습도 맨날 예쁘게 찍어준다며 부럽다는 댓글도 많다. 어느 한쪽이 아깝다는 건 나와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남자친구는 내가 있어,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 우린 더욱 특별해졌다. 연애는 이런 사람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S, 27 세,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