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원>

안팎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영화제는 반드시 열려야 한다’는 공통된 바람으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힘을 주어 걸음을 뗐다. 올해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는 아시아 독립영화인 네트워크 ‘플랫폼 부산’의 신설, 그리고 작년보다 10여개 국이 늘어난 총 75개 나라의 참여로 다양한 문화의 개성 넘치는 시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플랫폼 부산’ 신설은 지난 5월 고인이 된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뜻을 이어받는 의미가 크다. 아시아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독립영화를 만드는 아시아 영화인들이 경험을 나누며 공동 성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추진해왔던 프로그램을 실현시킨 것이다. 더불어 ‘아시아 영화의 창’에 초청된 월드 프리미어 영화를 대상으로 ‘지석상’을 신설해 아시아 영화의 발전을 꾀한다. 고인의 추모 행사는 영화제 기간 중인 10월 15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상애상친>

총 2백98편의 작품이 초청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페미니즘이 약동하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뛰어난 여성 감독의 작품을 개·폐막작으로 선정했다. <마돈나> 이후 2년 만에 장편영화 <유리정원>으로 돌아온 신수원 감독이 올해 개막작의 주인공이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배우 문근영이 다리에 장애가 있는 생명공학 연구원 ‘재연’을 연기하며 지금껏 본 적 없는 색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실비아 창 감독의 <상애상친> 역시 중국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세 여성의삶과 미묘한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내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마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거장의 신작을 미리 접할 수 있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서는 <블랙스완>으로 충격을 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연출하고 제니퍼 로렌스가 출연한 <마더!>를 비롯해 전작들과 사뭇 다른 결을 보여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세 번째 살인>, 감각적인 멜로 연출이 돋보이는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나라타주>, 정재은 감독이 나카야마 미호와 함께 작업한 <나비잠> 등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죄 많은 소녀>

아시아 신예 감독들의 작품 중에는 중화권 영화가 강세다. 뉴 커런츠 섹션에 홍콩 영화로서는 7년 만에 <쪽빛 하늘>이 선정됐고 그 외에도 대만 영화 <마지막 구절>, 중국 영화 <여름의 끝>과 <선창에서 보낸 하룻밤> 등이 초청돼 최근 중화권 영화의 급변하는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죄책감이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다룬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최근 일본은 내년 개봉 일정이 꽉 차 극장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영화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시아 영화의 창 섹션에는 일본 영화만 11편이 선정됐고 그 가운데 기타노 다케시, 구로사와 기요시, 가와세 나오미 등 거장의 신작도 잔뜩 포진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함께 TV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영화로 옮긴 요시유키 기시 감독의 <황야>는 러닝타임이 무려 5시간으로 일본의 스다 마사키와 한국의 양익준이 출연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국 영화의 오늘에서는 개봉 버전에서 19분이 추가된 <군함도: 감독 판>과 <환절기>로 지난 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관객상을 받았던 이동은 감독의 신작 <당신의 부탁>, 광화문 시네마가 만든 전고은 감독의 <소공녀> 등 중견 감독과 신인 감독의 다양한 색깔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루벤 외스틀룬드, 미셸 프랑코,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등 비아시아권 중견 감독의 새로운 영화들 역시 부산을 찾았다. 특히 월드 시네마 섹션에 초청 된 레오나르도 디 코스탄초의 <침입자>, 프랑수아 오종의 <두 개의 사랑>,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은 감독의 노련함과 미장센이 빛나는 필견 영화다. 장 뤽 고다르의 1980년대 영화가 아시아 최초로 상영을 앞두고 있는 것도 기대되는 소식.

이 밖에도 지난 2월 타계한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혁신적인 세계를 다시금 만나볼 수 있는 <스즈키 세이준: 경계를 넘나든 방랑자>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초청하는 사하공화국의 영화들 <사하 시네마: 신비한 자연과 전설의 세계>는 극장에서 다시 보기 힘든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 다. 또한 변화하는 흐름을 반영해 영화의 전당 1층에서는 VR 시네마 전용관을 마련, 총 30편의 VR 영화를 미리 경험할 수 있다.

영화제를 둘러싸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올해도 작년처럼, 작년에도 재작년처럼 단지 ‘영화’를 보기 위해 부산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부푼 마음으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어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영화가 열어준 새로운 시각과 가치관을 떨림 속에 곱씹으며 충만해진 마음으로 다시 있던 곳을 향해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영화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라는 영화제의 본질을 잃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