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가 새하얀 세계에 나란히 서 있다. 여자가 검은 선으로 네모 상자를 그리고 안으로 발을 내딛자 남자가 그녀의 뒤를 따른다. 곧이어 두 남녀는 기묘한 소꿉놀이를 시작한다. 커플의 연애 과정을 소꿉놀이에 빗대어 표현한 정유미의 <연애놀이>는 세밀한 연필 드로잉 기법으로 남녀의 심리 변화를 생생하게 담아낸 애니메이션이자 그림책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한 정유미 작가는 <연애놀이>뿐만 아니라 <먼지아이> <나의 작은 인형 상자>를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후에 그림책으로도 엮었다.
미쟝센 단편영화제 최우수상,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손꼽히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그랑프리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걸출한 상을 휩쓴 정유미의 애니메이션들은 장면을 편집하고, 각색해서 새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책으로 지어졌다. “단편 애니메이션은 영화제 밖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영화제 기간 동안만 상영하고요. 단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저는 그런 작업물은 소장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제 작품도 물리적인 형태로 남기고 싶었죠.”
흑백 드로잉으로 고요하지만 강력한 흡인력을 내뿜는 그녀의 애니메이션은 책으로 읽을 때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영상의 호흡과 그림책의 호흡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집중하는 특정 시간 동안 흐르지만 그림책은 좀 더 독자들의 리듬에 맡기죠. 중간중간 생략된 장면이나 여백이 있어 독자 스스로 상상할 거리도 많아지고요.”
글이 없거나 짤막한 그림책은 오히려 책장을 빨리 넘길 수 없다. 그림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으니 천천히 눈으로 그림을 따라 읽고 또 멈추어 바라보며 말 없는 그림의 뜻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정유미의 그림책이 특히 그렇다. 색채 없이 얇은 연필 선으로 탄생한 그녀만의 특별한 그림체가 시선을 집중시킨다. “저는 색보다는 형태에 더 재미를 느껴요. 처음에는 색을 쓰지 않는 게 편해서 그랬는데, 지금은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가장 잘 맞는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방안 구석에서 홀로 맞딱드린 외로움과 고독을 표현한 <먼지아이>와 상자 속 소녀가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나의 작은 인형 상자>로 개인의 내면과 심리에 집중한 이야기를 그려온 정유미는 이제 다른 주제로 시선을 돌리려 한다. “이전에는 개인 내면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구성했다면 이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벌어지는 일들을 풀어보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은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관계와 경험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