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원은 대기업 제품의 광고 전략을 짜 수주하면 론칭하는, 정신없이 바쁜 ‘광고쟁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늘 꿈꾸던 음악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분야를 바꿔 음반을 매니징하는 ANR 업무를 맡았지만 자연스레 이전의 커리어를 살려 프로모션과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짜는 일을 도맡았다. 적지 않은 스트레스 속에서 업무를 수행해가며 부업으로 에어비앤비를 시작했고 이 작은 결심으로 커리어의 두 번째 장이 열렸다.
하고 싶던 음악 분야에서 자신의 강점을 찾아 일을 했다. 퇴사를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광고 회사에서 음악 회사로 옮기면서 연봉이 좀 줄었다. 업계의 규모가 다르니 감내하고 왔는데 집안일로 그간 모은 돈을 전부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 생겨서 금전적으로 휘청거리게 됐다.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에어비앤비 룸 셰어를 시작했다. 그때 살던 작은 투룸의 방 하나로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잘됐다. 싸게 내놓기도 했지만 음악 분야에서 일하고 홍대에 살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라고 소개해놓으니 독립된 방을 선호하는 유럽의 백패커들이 많이 왔다.
호스트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따로 만든 건 아닌가? 인생이 고달픈 시기였다. 회사에서 잘해내고 싶지만 이 분야에서 커온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게 많아 자존감이 하락한 시기였다. 그런데 집에 가면 누가 있으니까 하소연을 하게 되더라. 완전한 이방인이기도 하고. 여행자들은 대부분 기분이 좋은 상태이지 않나. 캔맥주 나눠 마시며 그렇게 한두 시간 이야기하다 맘이 맞으면 집 근처에 내가 자주 ‘혼술’ 하던 곳으로 데려가 2차를 했다. 그런 생활이 참 특별하게 여겨졌다. 회사에서는 ‘지질이’인데 퇴근하면 나도 백패커가 된 것 같았다. 그들에게 우리 동네를 소개해주면서 나도 이곳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더라. 그렇게 이중생활을 하다가 문득 이 시기를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선물하는 기분으로. 1년 3백65일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까. 그렇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이 나왔나? 책도 나왔고 에어비앤비에서 한국 대표 인기 호스트로 뽑혀 프랑스에도 다녀왔다. 회사 바깥에서 일이 잘되니까 회사 일에 집중이 안 되더라. 그래서 퇴사했다.
에어비앤비만 하기 위해서? 당시에 숙박업을 하는 소위 ‘큰손’들이 감언이설로 꾀는 일이 많았다. 투자할 테니 더 굴려보자고. 금전적으로는 잘됐는데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서 결국 정리당했다. 화병이 나서 3개월 정도 집에 틀어박혀 지냈는데 그때 스페인의 말라가라는 해안 도시에서 온 게스트가 있었다. 내 집에서 하는 에어비앤비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 재미까지 잃고 싶진 않아서 생기 있는 외국인 관광객을 계속 만나려 했다. 스페인 남부 휴양지 말라가에서 온 그 친구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서울에 오는 게 자기 버킷리스트의 일부라서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왔는데 서울이 아주 예쁘다고 했다. 그때 나도 버킷리스트를 준비하고 실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6년 가까이 쉬지도 않고 달려왔으니까. 그중 하나가 전처럼 누군가와 소탈하게 소통하고 싶다는 거였다. 이번에는 외국인 말고 한국 사람과 친해지면 어떨까 싶었다. 우리 집에 세 번이나 머문 독일 친구 루카스가 내게 알려준 것이 있다. 그는 가정의학과 의사인데 내가 게스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치유받는 기분을 느낀 것이 낯선 사람과 대화하며 정신을 치유하는 유럽의 복지 프로그램과 같은 방식이라고 하더라. 나는 그걸 ‘라이프 셰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 대화가 무척 그리웠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낯선 이에게 고민을 털어놓던가? 처음에는 페이스북에 5명 정도 모아서 해보고 싶다고 글을 올렸다. ‘그동안 외국인들과 해왔는데 너무 재미있었지만 지금은 그 재미를 잃었다. 서로 나이도 사는 곳도 묻지 않고 1박 2일 동안 우리 집에 머무르면서 이야기하자.’ 작은 기획인데 공유가 많이 됐다. 그런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다들 만족도가 높았나? 물론이다. 새벽 3시에 올렸는 데 5분 안에 신청한 사람이 하나같이 여행 작가, 패션 브랜드 대표, 매거진 대표 등 유명인이었다. 걱정이 많아서 새벽 3시에 잠 못 드는 사람들.(웃음) 자주 할 순 없지만 못 불렀던 사람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지속적으로 라이프 셰어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빠르게 성장했고 기업에서도 문의가 왔다. 작은 프로젝트였지, 사업을 목적으로 한 건 아니기 때문에 고민했다. 사실 1박 2일간 내 집에서 사람들을 관리하는 게 체력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꽤 지치는 일이어서 고민하던 차였다. 무엇보다 문의해온 곳이 포스코였다. 진행하기로 결심하고 이번에는 한옥을 빌려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 주변의 다른 회사들에서도 요청이 와서 기업 일이 많이 늘게 됐다.
그때부터 ‘라이프 셰어’를 사업 모델로 구축하기 시작한 건가? 교육 사업자와 동시에 ‘라이프 셰어’라는 이름으로 저작권과 상표권을 등록하면서 비즈니스로 구체화했다. 교보재도 개발했다. 많은 사람과 정량적으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화 카드인데, 그동안 다녀간 수백 명과의 대화 가운데 좋은 대화를 이끌어낸 질문이나 문장을 추리고 다시 시뮬레이션을 해서 만들었고 대화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UI(User Interface)도 개발해서 시스템화하는 과정이다. 교보재만 있으면 누구나 호스트가 없어도 안정적으로 라이프 셰어를 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작가로서 방송과 강연 활동도 하고 있다. 프리랜서로서 자신의 몸값을 책정하는 노하우가 있나? 그런 노하우가 없어서 협상 관련 책을 많이 본다. 최근 <협상 바이블> 이라는 책을 보고 저자인 류재언 변호사와 함께 나 같은 1인 기업가를 대상으로 하는 6월 라이프 셰어 캠프를 진행했다. 모든 일이 자신의 경험에서 발현되고 그것을 일에 투영하는 것의 반복이다. 나의 니즈에서 출발한다. 그게 내가 그나마 제일 잘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을 상대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항상 행사를 진행할 만큼의 사람이 있더라.
직장 생활이 5~6년 차쯤 되면 회사 밖 삶을 꿈꾼다. 삶에 변화가 필요한데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나는 스스로 부업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게 사이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사이드 프로젝트가 직업이 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경험하면서 원리를 발견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서는 쿨할 수 있다. 직업에 필요한 능력이 부족하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사이드 프로젝트는 좀 못해도 괜찮다. 거기서 캐릭터가 잡힌다. 요즘은 얕고 넓은 시대이기 때문에 그 캐릭터를 2년 정도만 쌓아도 사람들이 주목한다. SNS 시대라 널리 알려지는 것도 금방이다. 사이드 프로젝트가 잘 안 됐다 해도 손해볼 건 없다. 직장에서 이미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면이 있어야 직장에서도 나를 다른 시각으로 본다. 나도 에어비앤비를 하면서 오히려 회사에서 잘 풀렸다. 외국인과 새로운 플랫폼으로 뭔가를 즐기는 ‘덕후’로 보였던 거다. 하나의 세계가 생기니까 해외 아티스트를 관리해야 할 때는 무조건 내게 일이 오기 시작했다. 많은 직장인이 ‘뭐, 그렇게까지 하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요즘은 캐릭터가 생기면 더 매력적인 커리어를 만들 수 있다. 요리하는 의사처럼. 사이드 프로젝트의 마법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