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를 좋아하는 대학생이었던 류지원이 선수 등록까지 한 건 그저 당구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선수 등록과 동시에 우연찮게 당구 방송 경기의 심판을 봤고 그 일이 지금의 업이 됐다. 지금은 베테랑 심판이지만 처음 심판으로 나선 경기는 절대 잊지 못한다. “원래 당구 심판은 경기 내내 민첩하게 움직이며 공의 위치를 가까이에서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송은 카메라 라인에 따라 심판의 동선도 신경을 써야 하더군요. 그 사실을 몰랐던 제가 계속 카메라를 가리는 바람에 문제가 됐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접전 상황에 가까이 가되 카메라 가리지 않는 법을 터득했죠.”
당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선수나 심판이나 여성이 많은 종목이지만 그렇다고 여성들에게 열려 있는 스포츠는 아니다. 종목의 특성상 선수들이 어떤 방향으로 경기를 진행할지 예측하기 위해서는 공의 성질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여성들은 공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는 편견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류지원 역시 처음 선수 등록을 했을 때 ‘쟤가 공을 어떻게 알아?’라며 평가절하하는 시선을 받았고 그 편견은 자연스레 류지원의 판정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일에는 왕도가 없어요. 일단 공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어요. 실력이 늘 때까지 당구 훈련을 했고요. 그 결과 실력도 많이 올라갔고 결정적으로 2016년 전국당구대회에서 선수로 우승을 하면서 심판으로서도 공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인정받게 됐죠.”
어디까지나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함께 일하는 심판들과 신뢰가 쌓이지 않을 때는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한 경기에 함께 나가는 심판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판정을 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관되지 않은 판정은 경기의 승패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물론이고 대회 자체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큰 요소가 된다. “저는 동료 심판들을 같이 전쟁터에 나가는 동지라고 생각하는데, 이제 막 심판을 시작한 분이나 심판의 생리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은 저를 그냥 ‘나대는 여자’로 생각해요. 제가 그분들을 가족이나 동지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아주겠죠? 적대감을 드러내던 분들도 시간이 지나 제 본심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되더라고요.”
류지원은 국내에서 당구 심판을 업으로 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당구 심판은 일당으로 보수를 받지만 생업으로 삼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류지원 역시 지금은 심판으로서 가장 높은 등급, 그 안에서도 A급 심판으로 대우받고 있지만 그 전에는 직장생활과 병행해야 했다. “대한 체육회에서 상임심판제도(심판에게 월급을 주어 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시행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 종목당 한두 명 정도만이 그 혜택을 보고 있고, 당구는 포함되지 않았어요. 언젠가 혜택을 받게 될 날이 있겠죠.” 류지원은 지난 8월 국내 최초로 당구 3 쿠션 세계 대회의 국제 심판으로 초청받았다. 포켓볼 분야에 이어 또 한번 국제 심판으로 파견 나간 ‘국내 최초’이자 ‘최초의 여성’ 심판이다. “그저 재미있어서 줄곧 해온 일일 뿐인데 어쩌다 보니까 당구를 빼면 제 인생에 남는 게 별로 없는 느낌이에요.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당구 심판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 논문이 통과되면 그것도 아마 최초가 되겠죠? 잘했든 못했든 제가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 훗날의 누군가가 저를 보고 따라올 수 있다는 사실에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껴요. 언젠가 당구 심판을 꿈꾸는 여성들이 저를 경쟁 상대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분들이 언제든지 저를 뛰어넘어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