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자리한 유인도인 페어섬(Fair Isle)에 발을 디뎠을 때, 당신은 생경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건 독특하고 신비한 모습을 지녔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평범한 삶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섬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곳만의 분위기다.
페어섬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한 지역으로,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와 셰틀랜드 제도(Shetland Islands)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55명. 한때는 3백60명까지 살기도 했지만, 이는 최고점을 찍은 1861년의 인구다. 그 이후부터 페어섬의 인구는 감소세를 이어왔다. 1973년에는 심지어 인구가 42명까지 줄어들어 이 섬에 사람이 살지 말지 여부를 논의하기도 했다. 유인도 하나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손도 많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급수 장치를, 전기 공급망을, 도로를 관리해야 한다. 가게와 선착장, 비행장과 학교에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페어섬은 여전히 무인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섬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섬에는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과 학교, 건설 회사와 편물 회사, 기상대, 그리고 몇 개의 B&B(breakfast & bed)형 숙소가 있다. 심지어 철새와 바닷새의 개체 수를 조사하는 조류 관측소도 1년 내내 활발히 일을 벌이고 있다. 겨우 55명의 사람들로 가능한 일이냐고? 놀랍게도 그렇다.
이곳에서는 어린아이를 제외한 성인은 모두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딱히 원해서 그런다기보다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56세의 피오나 미첼(Fiona Mitchell)은 동네에서 작은 가게를 하면서 남편과 함께 우체국도 운영 중이다. 또 초등학교에서 미술 강사를 하면서 소방청 페어섬 지소에서 소방장(watch manager)도 맡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피오나는 공설 비행장의 항공기 소방사 면허를 가지고 있으며, 지역 평의회 의원 일도 하고 있고, 섬 내 다양한 단체의 이사로도 재직 중이 며, 이곳의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편물 제작 일도 조금 하고 있다. “여기서는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항상 해야 하는 다른 일이 생기거든요.” 피오나는 열 살 때 이 섬에 왔다. “외지 사람들이 페어섬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지점은 저녁이나 특히 겨울에 심심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섬의 일원이 되어 며칠만 지내보면 그게 얼마나 큰 오해인지 알 거예요.”
‘지루함’이란 이곳 사람들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새로운 사람이나 문물을 마주하기 어려운 외딴 곳에 자리했다는 사실만 빼면 섬의 생활은 지루할 틈 없이 흐른다. 피오나처럼 여러 직함을 갖지 않더라도 이곳 주민들은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고 수리하고 유지해야 한다. 이곳에 사는 이상 누구든 해결사가 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바깥에서 도움과 물자를 받으려면 비용이 비쌀 뿐 아니라, 아예 도착 하지 못할 위험성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모든 섬 지역이 그렇지만 페어섬 사람들만큼 ‘날씨가 허락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대서양과 북해, 노르웨이해가 만나는 자리에 위치하다 보니, 섬에 드나드는 행위는 날씨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과 물자의 이동에서는 더욱 그렇다. 유럽에서 가장 작은 비행장 중 하나로 꼽히는 페어섬 비행장에는 일주일 동안 비행기가 열네 편가량 들어오는데 겨울에는 열 편으로 줄어든다. 물론 그나마도 날씨가 허락해야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선택지는 ‘굿 셰퍼드 4호’ 를 타는 것이다. 1986년부터 운항해온 이 배는 섬을 오가는 연락선이자 페어섬의 두 번째 생명 줄이다. 일주일에 세 번 셰틀랜드 본토의 그러트니스 (Grutness)에서 출발하는 이 배는 도착하기까지 2시간 30분이 걸리는데, 오는 내내 거친 파도를 뚫어야 하는 탓에 많은 사람이 최후의 선택지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승조원도 종종 뱃멀미를 할 정도라니 이해할 만하다.
연락선은 승객들에게는 그다지 인기 있는 선택지가 아니지만, 지역사회 에는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다. 음식을 비롯해 신선한 과일과 채소, 건축자재, 생활용품, 심지어 자동차도 배에 실려 페어섬으로 들어온다. 보통 화요일이 되면 굿 셰퍼드 4호는 창고에 섬사람들을 위한 화물을 가득 싣고 노스 헤이븐(North Haven) 부두에 기적을 울리며 들어온다. “항구에 들어갈 때마다 섬사람 대부분이 배를 마중하러 나와 있다가 짐 내리는 것을 도와 줍니다. 자신의 물건이 없어도 시간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 나와 있어요. 땡볕이 내리쬐어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늘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 외로울 일이 없죠.” 굿 셰퍼드 4호의 선장 이언 베스트(Ian Best)의 말이다. “이렇게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지탱해주는 이웃들은 아마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이언의 형제 피오나가 페어섬 사람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피오나의 말은 섬사람 모두 공유하는 인식이자 이 섬이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이유다. 그렇지만 반면에 그 이유로 페어섬을 답답한 공동체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은 모든 주민이 서로 돕고 살기 때문에 외톨이가 될 일은 없지만, 워낙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 간의 긴장감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때로는 더욱 두드러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 곳에서는 이웃들로부터도, 나 자신으로부터도 도망치거나 숨을 방편이 별로 없다.
2007년 페어섬에 이사 온 데이비드 킹은(David King) 또한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마치 촘촘하게 짜인 편물 같은 이 섬의 사회에 완전히 녹아 들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이곳 사람들은 너나없이 섬에 새로 이사 온 사람 에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 역할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 입니다. 이곳으로 이주하려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모든 일을 나눠 하는 상태고 사회구조는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으며, 어딘가 한곳에는 끼어들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면 좋겠어요. 무언가 새로운 것 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오랫동안 이 섬을 지켜온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할 순 없을 거예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성정이 강하거나 기존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 못 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이곳에서 삶을 유지하는 데는 확실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존 베스트(John Best)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경험이 가장 많은 섬사람이다. 1973년부터 페어섬에서 살기 시작한 그는 올해 83세로 이곳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주민이다. 공공 의료 서비스직으로 섬에 정착한 그는 이 곳 사람들이 그렇듯 또 다른 직업을 찾았고, 얼마 지나 건설업체를 차렸다. 처음에는 깃대나 풍차를 세우는 작은 일을 하던 그의 회사는 시간이 흘러 섬 안의 모든 건축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유일한 업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존은 바위투성이 해안의 멋진 광경이 내려다보이는 섬의 남쪽 끝에 2층짜리 널찍한 자기 소유의 건물까지 지었다. “이 섬에 온 지 47년이 됐지만, 떠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굳이 이 섬에 올 필요가 없지요. 이곳에서의 삶은 돈을 버는 것과는 다른 유형의 성취감 을 느끼게 해줘요. 이를테면 이 섬과 어울리는 멋진 건물을 지을 때,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작게나마 도움을 줄 때죠. 우린 서로를 커다란 확대가족으로 여기고 있어요.” 그가 가족이라 부르는 이 사회 안에서 존은 모두의 할아버지 역할도 겸하는 중이다. 나이가 많기도 하거니와 안수받은 목사로 예배를 집전하고 있어 많은 섬사람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 거리를 털어놓기 위해 그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지역사회를 위해 큰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동네에 비밀은 없거든요. 서로 워낙 잘 알 다 보니 가끔은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요.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지요.”
좋거나 나쁘거나 끈끈한 상호부조 관계로 엮인 이 작은 공동체는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삶을 꾸려갈 예정이다. 원치 않더라도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을 해내야 하고, 서로의 생활에 속속들이 관여하는 것은 이 섬이 자생 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보조금 지급 사업이나 섬 주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쓰이던 유럽의 지역 보조금이 브렉시트로 중단될 위기에 처한 지금 상황에서는 내부적으로 더욱 똘똘 뭉쳐 자생 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55명의 페어섬 사람들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