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출신의 여성 소설가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데뷔작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지금껏 말해지지 않은 소수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째서 중요한지 말하고 있다.
어떤 문장은 덧붙일 필요가 없다. 이야기가 가진 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근사한 단어를 힘주어 고를 필요도 없다.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작가 자신이 보고 겪은 삶을 필요한 만큼의 언어로 담아낸 강렬한 자전 소설이다. 독재자가 집권하던 조국 루마니아를 탈출한 곡예사 가족의 이야기를 아이 ‘모니카’의 시선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소외된 삶에 드리운 폭력을 서늘한 문체로 과장 없이 조명한다.
머리카락으로 곡예를 하는 엄마는 예민하고 불안정하다. 모니카는 매일 엄마가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고 공연을 마칠 때까지 작은 트레일러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서커스를 하며 서유럽을 떠도는 이 가족은 ‘난민’이라는 신분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스파이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숙소와 서커스 밖의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집과 모국어를 잃은 이중의 소외 속에 루마니아에 남은 친척들을 향한 죄책감과 슬픔은 그들을 더욱 구속한다. 모니카는 더 큰 불행을 상상하며 현재의 슬픔을 잠재울 수밖에 없다. 절망 속에서 조숙하게 자라난 여자아이는 곧 자신의 몸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다. 난민-어린이, 난민-여성,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딸-어머니의 관계성까지, 여러 겹으로 소외된 여성의 삶에 가해지는 폭력적인 상황은 모니카의 삶을 통해 전부 증언된다.
순서에 맞게 진행되던 문장들이 곡예를 하듯 위 아래로 점프한다. 익숙한 비유의 반대편에서 절망이 그려내는 상상력은 새롭고 충격적이다. 문장 사이마다 현저히 벌어진 간격은 동굴처럼 앞 뒤 문장의 울림을 만들고, 독자는 그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니카의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들어선다. 아글라야 페터라니는 이 작품 이후로도 소위 문학적이라 여겨지는 스타일과 거리를 두며 아방가르드 문학을 향해 걸었다. 루마니아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지만 15살까지 문맹이었던 작가는 훗날 독학한 독일어로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시작은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신은 외국어를 할 줄 알까? 신은 외국인도 이해해 줄까?’
신의 국적은 어디일까. 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왜냐하면, 어떤 현실은 더 끔찍한 상상을 통해서만 살아낼 수 있기 때문에.
(배수아 번역, 워크룸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