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나비’와 ‘비비안’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감싸 안으며 기울어진 세계의 반대편에서 함께 걸어 나가는 이들의 곁에 사랑이 있다. 두 번째 장편 영화를 연출한 변규리 감독은 ‘다채로운 세상이 훨씬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곳’이라 힘주어 말한다. 11월 17일, ‘나비’와 ‘비비안’이 당신에게 갑니다. 문을 활짝 열어주세요.
지금까지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왔는데, 이 영화로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활동하는 ‘연분홍치마’라는 단체는 노동, 성소수자, 여성 인권 등과 관련한 현장에서 연대하며 그 안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고 있어요. ‘성소수자 부모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연분홍치마에 홍보영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 해주셨고 저도 촬영 현장에 가게 되었죠. 카메라 앞에 서서 커밍아웃 스토리를 털어놓는 부모님들의 언어와 표정, 감정들이 저에게는 많은 질문을 던졌어요.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의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겪는 차별과 혐오를 비슷하게 겪거나 원치 않는 질문을 많이 받아야 하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성소수자 부모의 정체성에 대해 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소수자 당사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출연진 섭외가 가장 핵심적인 과제였을 것 같은데, 어떤 과정을 통해 ‘나비’와 ‘비비안’의 삶을 담게 되었나요?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다음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부모님들을 찾아가 생애사 인터뷰를 했는데 나비와 비비안이 인상에 많이 남았어요. 두 어머니가 자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에요. 나비의 가정이 현실적인 모습이라면 비비안의 가정을 보면서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두 분 다 처음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기록촬영이라 여기고 다들 하니까 해야 하나 보다, 하셨다는데 나중에 두 분이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래,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라고 생각하셨대요. 촬영을 그렇게 많이 갔는데도. (웃음)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나오는 모든 부모가 에이 섹슈얼(무성애자), FTM (Female To Male Transgender) 등 자녀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게 인상 깊었어요.
저도 같은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처음 부모모임에 나와서 자녀의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부모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또박또박, 누군가 물어보면 뜻도 설명해 주시더군요. 그것이 또한 부모님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다양한 퀴어 용어를 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주말마다 모여서 퀴어 관련 서적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기도 하고 문화생활을 함께 즐기기도 하거든요. 제2의 학교 혹은 동아리를 하는 것 같았어요. 보기 좋았고, 덕분에 저도 배운 것이 많아요.
가족 구성원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일을 넘어 그들은 사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죠. 트렌스젠더의 성별정정허가신청이나 차별금지법 입법의 문제로 이어지는 흐름은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촬영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문제가 있었나요?
가장 놀랐던 것은 법원의 성별정정허가를 받기 위해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해야 하는 소모적인 노력이 무척 많다는 점이었어요. 수십 종의 서류를 준비해서 법원에 가더라도 허가 여부는 오로지 담당 판사에 의해 결정이 나죠. 쉽게 말하면 관할 법원 판사의 마음에 달렸어요. 그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더군요. 성별정정의 절차가 지금보다 간소화되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증명하면 되는 신고제로 바뀌면 좋겠어요. 이와 관련하여 여러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에 맞춰 필요한 법 제정으로 보완한다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비용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도록 법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어요.
촬영 내내 감독으로서 유지하고자 한 태도는 무엇인가요?
촬영하지 않을 때는 출연진들 모두와 편하게 지내는데 현장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 목소리가 겹쳐 들어가는 것이 싫기도 하고 이 카메라에서만큼은 주인공들이 자신의 일기를 쓰듯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글씨를 또박또박 쓰고 싶은 깨끗하고 아담한 일기장이 되고자 노력했어요.
저는 결국 이 영화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안아주기까지 필요한 사랑의 깊이와 힘. 거창한 질문이지만 감독님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랑은 어떤 형태인가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지지하고 존중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들릴 수 있지만 실천은 어려운 일이에요. 저 또한 그렇고요. 그래도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노력하는 모습을 서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변할 수 있으니까요.
줄곧 소수성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다루고 있죠. 그런 소재들에 끌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영화로 만드는 동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성장한 환경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목받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요. 자신이 퀴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더 풀어보고 싶어요. 다채로운 세상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곳이니까요.
처음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던 사건이나 영화가 있나요?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학생 신분으로 일을 했었어요. 그 연구소에 한국독립다큐멘터리 아카이빙이 잘 되어있었는데 1세대 감독님들의 작품을 보고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영화로 풀어낸 감독님들이 멋져 보였어요. 나도 이런 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어느 날 학교에 특강을 오신 변영주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어요. 너는 뭘 하고 싶니? 물으셨는데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다는 말을 못 했어요. 그날 집에 와서 거의 1시간을 울었어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저 자신에게 화가 났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는 조금 더 울었던 것 같아요. 사는 게 너무 고단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던 와중에 극장에서 본 <두 개의 문>(2012)은 충격적이었어요. 다큐멘터리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밝은 영화가 아니었는데도 제 내면에 힘을 주는 영화였고 희망에 차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를 만들 때 언제나 지키고자 하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궁금합니다.
연분홍치마에서 영화를 만들면 내부 구성원들에게 여러 차례 피드백을 받아요. 영화를 구성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죠. 어느 정도 영화의 꼴을 갖추면 주인공들과 출연진에게 가편 시사를 하는데요. 이 영화가 당신의 삶을 왜곡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꼭 거쳐요.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이 일을 통과할 때가 제작과정에서는 가장 뿌듯하고 행복한 순간이에요. 더불어 많은 사람이 재밌어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소재와는 상관없이,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