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여자들의 삶이야 말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TV와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여성들을 집안에만 머물도록 종용할 때 정신병원은 여자들로 넘쳤다.
그리고 그 여자들은 고백의 형식이 아니고는 자신의 삶을 말하지 못한다.
여성의 삶은 어떻게 틀어 막히고 어떻게 발설되는가.
처음 만나는 자유 (1999)
‘수재너’(위노나 라이더)는 보드카와 아스피린을 과복용해 병원에 실려 온다. 의사는 자살을 시도한 이유를 묻지만 수잔나는 두통이 너무 심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곧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경계성 인격 장애’ 진단을 받는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진 여성을 비롯해 다양한 여성 정신질환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1960년대 여성들의 삶을 비춘다. 수재너는 첫날 병원에서 많은 ‘미친’ 여자들을 만난다. 낯선 광경에 압도되어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생각하지만 함께 자고 먹고 생활하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들은 병원 밖 사람들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강박적일 뿐이다. 거식증이거나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레즈비언이거나 신체적 트라우마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여성들은 결국 사회와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에서 비롯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병원에 머물러 있다. 수재너와 친구들은 어디에서도 받지 못한 공감과 자연스러운 이해 속에서 우정을 쌓아 나간다. 이 우정은 너무 투명해서 때로 그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하지만 수재너에게는 풀 수 없는 숙제 같았던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 또한 된다. 1년 후 병원을 나온 수재너 케이슨은 자서전 <Girl, Interrupted> (1993)를 쓴다. 이 영화의 원작이다. 영원히 병원에서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수재너의 친구들은 모두 수재너처럼 퇴원 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 사실은 필연적으로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에 의문을 던진다.
내 책상 위의 천사 (1990)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감독은 언제나 여성 영화를 만들고 찍어왔다. <내 책상 위의 천사>는 1924년생 뉴질랜드 작가 재닛 프레임이 쓴 동명의 자서전이 바탕이다. 한 작가의 일생을 다룬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가를 보여주는 수작으로 199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재닛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글 솜씨로 시인을 꿈꾼다. 청소년기에 이미 지역 문예지에 시가 실릴 정도로 타고난 재능이지만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교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극도로 내향적인 성향의 재닛에게 자연스러운 대학생활은 언제나 닿을 수 없는 무엇이었고 교사 일은 어려웠다. 장학사가 참관하는 수업 도중 그대로 교실 밖을 나온 재닛은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다. 재닛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학 교수들이 재닛을 정신 병원에 입원 시킨다. 재닛은 ‘조현병’ 진단을 받고 여자들로 가득한 병원에서 8년을 보낸다. 당시 정신 치료에 널리 쓰이던 전기충격요법을 200번 넘게 받으며 재닛은 정신을 잃어간다. 급기야는 뇌 절단 수술을 앞두게 되는데 그 와중에 쓴 시집이 출간되어 수술을 면한다. 병원에서 나온 재닛은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하지 않고 글만 쓸 수 있는 환경에 머문다. 그 때 쓴 소설로 문학상을 받고 작가 지원의 일환으로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열병 같은 사랑은 재닛에게 임신 중절의 아픔을 남긴다. 사방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재닛은 다시 일자리를 찾지만 조현병으로 인한 8년간의 입원은 일 할 기회를 앗아간다. 심각한 자살 욕구로 다시 정신 병원을 찾은 그는 조현병 진단이 오진이었음을 확인 받는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어서 생긴 문제들이었다. 이 시기에 쓴 소설로 다시 한 번 작가로 눈에 띄고 출판사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재닛은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언니가, 동생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아빠가 죽는다. 삶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밟으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재닛의 삶이 제인 캠피온의 사려 깊은 시선 안에서 아름답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