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의 익숙한 불안감. ‘나’는 산부인과 의사의 한 마디에 병원 입구에 도달할 때까지 머릿속을 부옇게 메웠던 절망이 한순간 사라지며 거리를 걷는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된다. 이는 1963년 비슷한 상황 속에서 결국 벌어졌던 ‘그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은 1963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임신 중절의 과정과 감정을 낱낱이 기록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작가는 그 시절 수첩에 썼던 메모와 기억을 더듬어가며 수십 년이 지난 후 그 일을 글로 써나가는 과정에서, 임신 중절이라는 절박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당대 풍경과 지배적인 가치관, 남성과 여성에 대한 밀도 높은 사유를 이끌어낸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생리가 일주일이 넘도록 시작되지 않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성인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그 극도로 불안한 시기의 결과는 매우 극단적이다. 임신이 아니라면 평소와 같이 친구들과 파티나 과제에 파묻혀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고 임신일 경우는 늘 납작하기만 바라던 내 뱃속에서 인간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임신임을 알게 된 화자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산부인과 의사뿐이다. 그러나 임신 중절이 불법이던 당시 프랑스의 어떤 의사도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대학생을 위해 자신의 권위에 흠집 날만한 일을 감당해주지 않는다. 보수적인 노동자 집안의 첫 고학력자인 나는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릴 수 없다. 남자친구는 발을 뺀다. 도움 줄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혼자 분투하는 동안 입덧은 시작되고 뱃속의 ‘그것’은 계속 자라난다. 평범한 일상들이 나를 비켜가고, 모든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임신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쪼그라든다.
결국 나를 도와준 것은 같은 경험을 했던 여자다. 여자가 소개해준 아주머니를 통해 나는 낯선 동네, 처음 가본 집에서 불법 임신 중절술을 받는다. 이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과 감정을 세세히 기록한 작가는 이 경험을 써야 했던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 이전과 똑같은 침묵을 일어나게 하는 일들을 다시 뒤덮어 버려도 말이다.’
고통의 한 시절을 뭉텅 썰어낸 듯 얇은 두께의 책에는 영원히 지속될 듯한 공포와 불안이 생생히 담겨있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불안과 내 몸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함에 대한 공포가 여성에게 실재하는 동안, 그러니까 언제나 이 책은 끊임없이 읽혀야 할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