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버지니아 울프보다 한 세대 전에 미국에는 샬럿 퍼킨스 길먼이 있었다. 미국 페미니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누런 벽지>(1892)를 집필한 후 본격적으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엄마 실격>(민음사)은 결혼으로 인해 다양한 형태로 억압 받는 여성들의 삶을 그린 열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결혼 이후 신경쇠약이 심해져 남편의 강요로 휴양을 하다 미쳐가는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룬 <누런 벽지>는 여성 우울증을 르포 수준으로 묘사해낸 수작이다.
몸이 약해진 화자는 남편 ‘존’과 함께 오래된 저택에서 휴양 중이다. 화자는 이 저택의 수상한 기운을 느끼지만 존은 그저 웃어넘긴다. 아내를 아끼는 나머지 건강해질 때까지 침대에 누워만 있기를 다정하게 강요하는 존은 화자가 좋아하는 글쓰기는 물론 타인과의 만남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굴레 속에서 화자의 신경은 더욱 쇠약해지며 벽지가 움직이는 듯한 망상에 시달린다. 화자는 벽지 속에 갇혀 있는 여자를 본다. 그 여자에게서 자신을 본다. 그 안에 갇혀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본다.
샬럿 퍼킨스 길먼 소설들의 의미는 가부장제에 희생당하는 여성을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고발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모든 소설 속 여성들은 자신을 도구나 물건처럼 여기는 남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한다. 스스로 굴레를 깨기도 하고 다른 여성의 도움으로 용기를 내기도 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여성의 교육과 직업에의 계몽을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전하며 유방암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여성 인권 증진에 노력을 기울였다. 오직 여성과 아이로만 이루어진 도시에 관한 작품 <벌들처럼> 또한 똑똑한 여성들이 모여 경제적 기반을 다지며 적재적소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곳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 단편은 훗날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 관한 장편 소설이자 작가의 대표작 <허랜드>의 단초가 된 듯하다.
육아의 고충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현명하게 타파해내는 <발상의 전환>, 어린 하녀가 남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된 아내가 이혼 후 하녀와 아이를 함께 키우는 내용의 <반전> 등은 연대가 세상을 어떻게까지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치 있는 이야기다.
샬럿 퍼킨스 길먼은 모두의 시야에서 쉽게 사라지는 ‘결혼한 여성’의 삶을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비춘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유구하게 자리 잡힌 제도가 무엇을 연료 삼아 바퀴를 굴려 왔는지, 결혼 이후 여성의 삶은 실시간 트렌드가 ‘독박육아’인 지금, 백 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