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주커
Jeremy Zucker
어쿠스틱 기타의 산뜻한 멜로디,
‘내게 와줄래?’라는 부탁을 조심스레 건네는
노랫말을 담아낸 ‘comethru’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싱어송라이터.
2015년 EP <Beach Island>를 공개한 후
정규 앨범 <love is not dying>과
<CRUSHER>를 비롯한 신보를 꾸준히 선보이며
내밀한 감정을 음악에 표현했다.
3년 전 첫 내한 단독 공연을 열었던 그는
지난 10월 10일에 한국을 다시 찾아와 페스티벌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2>의
무대에 올랐다.
오늘 아침에 타투를 했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휴대폰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등 한쪽에 내가 태어난 연도인 ‘1996’과 별을 새겼다. 세계 곳곳의 타투이스트 SNS를 팔로해 작업물을 종종 살펴보는데, 이번 내한을 앞두고 서울에서 작업하는 타투이스트를 찾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를 발견했다. ‘당신에게 타투를 받고 싶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가 이런 답장을 보냈다. ‘난 당신의 열혈 팬이다!’(웃음) 내가 투숙 중인 호텔로 직접 찾아와 나와 내 팀원들에게 타투를 새겨주었다.
지난밤 이태원 클럽에서 디제잉을 했고, 이번 화보 촬영 전에는 페스티벌 리허설을 했다. 지칠 법한데도 유쾌하게 촬영에 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지 않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밤 10시가 되어야 모든 일정이 끝날 듯하다. 내일 아침에 일본으로 넘어가 월드 투어를 이어가야 하니 오늘 밤을 알차게 보내고 싶다. 일단 공연이 끝나면 고깃집에 갈 계획을 세워두었다.
월드 투어를 하며 각국의 문화를 접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내한한 뮤지션이라면 무엇보다도 한국 관객의 ‘떼창’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까 싶다. 3년 전 첫 내한 공연을 했을 때 내 노래를 따라 부르던 관객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사랑을 느끼게 한 놀라운 순간이었다.
오늘은 단독 공연이 아닌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다. 두 무대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단독 공연은 관객이 내 음악만을 듣기 위해 모이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데, 다수의 아티스트가 순서대로 등장하는 페스티벌은 그렇지 않아 더욱 긴장된다. 하지만 무대와 관객석의 규모가 크고, 관객의 호응도 폭발적인 만큼 강렬한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오늘 저녁에 펼쳐질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2> 현장도 무척 기대된다. (이날 공연을 마친 후 그는 인스타그램에 ‘역대 최고의 순간 중 하나(one of the best moments of all time)’라는 글을 남겼다.)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어릴 때부터 항상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음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현실적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 음악 다음으로 좋아하는 과학 관련 분야의 학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곡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2015년부터 공식적으로 음악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대학교에 진학해 분자생물학을 전공할 때도 틈틈이 음악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음악 창작 능력을 꾸준히 키워올 수 있었던 것 같다. 2018년 5월에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당분간 내 음악적 성과를 지켜본 후 진로를 결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성과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과학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2018년 9월에 선보인 EP <summer,>의 타이틀곡 ‘comethru’가 큰 사랑을 받은 게 중요한 기점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에 만든 음악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그땐 전문 장비 없이 노트북만 이용해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었고, 지인들에 관한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열 살 때 키가 점점 크는 것을 무서워하던 형을 위해 쓴 곡이 내가 만든 최초의 음악이다. 중학생 때는 사랑에 관한 곡을 꽤 썼는데, 그 음악을 들은 일부 친구들이 놀려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음악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다른 이의 시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작업을 이어오며 당신의 음악에 생긴 변화가 있나? 성인이 되기 이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대적으로 좁아 단순한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복합적인 삶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내가 마주한 상황과 감정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했다. 내게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가 음악에 담기고 있다.
지난 9월 베니(BENEE)가 피처링에 참여한 신곡 ‘I’m So Happy’를 공개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곡인가? 여행의 기억에서 영감을 얻었다. 휴식을 취하려고 떠났는데, 타인의 존재로 인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왔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와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와 반대로 ‘네가 여기에 없어 너무 행복해’라는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타와 드럼 등을 간결하게 활용하며 밝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표현하려 했다.
커버 이미지 속 당신의 얼굴도 참 행복해 보인다.(웃음) 여행이 ‘I’m So Happy’의 시작점이었던 것처럼, 주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드는 편인가? 물론이다. 가끔은 경험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을 한층 선명하게 그려내기 위해 과장되게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10월에 공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CRUSHER>는 나를 파괴하려 했던 사람을 떠올릴 때 마음에 번지는 분노를 강하게 표현했다.
최근 몇년간 선보인 음악을 차례로 들어보니 마치 제레미 주커가 주인공인 하나의 서사처럼 느껴진다. 본인의 일대기와 같은 음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솔직함. 그래서 곡 작업을 할 때 철저하게 혼자 남겨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솔직한 나를 마주하려 할 때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작업실에 앉아 홀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경한 감정이 밀려와 음악의 소재가 되어준다. 음악을 계기로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다양한 감정
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 같다.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용기를 내는 데 어려움을 느낄 때도 있나? 없다.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이 지난할 뿐, 그 결과 발견한 감정을 사람들한테 꺼내 보이는 건 망설이지 않는다. 가장 순수한, 본연의 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감정을 음악에 담아낼 때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나? 즉흥적으로 우러난 감정이지만, 이를 표현한 음악은 오랜 시간을 들여 계획적으로 만든다. 아주 작은 요소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듣기 좋은’ 사운드를 디자인한다는 게 내가 지금까지 뮤지션으로서 꾸준히 지켜온 원칙이다.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비롯한 여러 사운드를 음악에 활용해왔다. 새로운 사운드의 영감은 주로 어떻게 얻나? 평소 휴대폰으로 여러 가지 소리를 녹음해두고, 작업실에서 기묘하면서도 쿨한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발매 계획이 없는 음악에 쓴 사운드까지 전부 저장해두면서 언제라도 열어볼 수 있도록 일종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그 덕분에 더욱 다양한 사운드를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만돌린 소리에 빠졌다. 동료 뮤지션 첼시 커틀러(Chelsea Cutler)와 함께 만든 음악에 그 소리가 특히 많이 담겨 있다. 내 작업실에 있는 악기는 아니라 첼시의 것을 빌려 썼다.(웃음)
동료 뮤지션과 협업하거나 알렉산더23(Alexander 23)과 블랙베어(blackbear)를 비롯한 아티스트를 위해 곡을 작업한 적도 있다. 공동으로 작업할 때 특별히 신경쓰는 지점이 있다면? 함께 만드는 음악일지라도 혼자 작업에 몰두하며 내 생각과 감정을 반영하는 시간을 꼭 가지려 한다. 물론 협업 특유의 즐거움이 있지만, 내가 참여한 곡이라면 나의 진솔한 면이 어느 정도는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음악을 만들더라도, 나 자신을 솔직하게 대하는 자세는 잃지 않을 것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을수록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이 커지고, 그래서 음악 안에 나를 오롯이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음악’을 만드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려 한다.
이 세상에 음악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창작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꺼낸 감정이 응고되어 있는 음악은 듣는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음악을 통해 이해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수많은 관객이 함께하는 현장에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서로 다른 사람이 음악으로 연결되는 초월적 힘이 발현된다.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온전히 나를 위해 만든 음악으로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가 탄생하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음악은 결국 우리 삶의 보편적 언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