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저희가 운이 좋았습니다. 한국에 머무실 때, 그것도 숯이 가득 쌓인 청도 작업실에서 뵐 수 있다니요. 한국에 온 지 일주일 정도 됐어요. 파리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마침 시간이 됐어요. 청도까지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는 청도에서라면 선생님 작품과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왔어요. 파리에서 청도에 당도했을 때 작가로서 환기되는 바가 있지요? 파리가 주방이라면 청도는 요리의 재료가 만들어지는 들판 같죠. 파리에서 33년을 살았으니 청도에서 산 시간보다 파리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지 않습니까. (작가는 16세까지 경북 청도에서 자란 이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오랜 시간을 파리에서 살았지만 나의 근원은 청도입니다. 청도에서만 할 수 있는 질문이 있어요.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자랐는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이죠. 이 과정이 작업할 때 주된 재료이자 큰 힘이 됩니다.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는 새
롭게 받아들이는 정보나 지식도 중요하지만, 작가에게 작업은 결국 내면 깊이 자리한 한 사람의 영성을 꺼내는 일이니까요. 청도에 오면 그런 교감을 하게 되죠. 그러니 나는 여기에 오면 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요. 파리에 가면 내 밖으로 나간 것 같고.

서른 무렵 한국에서 멀리 떠나 이방인을 자처하는 작업 여정을 선택했음에도 근원과 본질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시는 것이지요? 인간에게 고향, 근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문명의 혜택이 없는, 자연 그 자체인 청도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디에서 작업을 하건 그 감성이 스며 있을 수밖에 없죠. 파리에서 작업하지만 내 작품은 도시 사람의 작품 같지 않잖아요. 현대미술은 뉴욕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는 곧 도시 미술이고요. 나는 현대미술을 하면서도 시골의 발상, 자연에 가까운 발상을 하는데 그건 아마도 고향이 청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나에게서 청도를 빼면 글쎄, 근원 없는 떠돌이 유랑객이 아닐까요.

요즘 근원에 대한 질문 외에 또 어떤 자문을 하고 계신가요? 내가 작가로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작업을 행하는지에 대해서요. 그 생각이 최근에는 ‘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숯을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산불이 많이 나고 있잖아요. 뉴욕 록펠러센터 채널가든 야외설치를 오픈하는 날에도 캐나다에 대규모 산불이 나서 뉴욕시 전체가 연기에 가득 찼어요. 마치 세계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자연과 순환하지 못하면 인간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어요. 순환이라는 것은 결국 치유이자 회복, 막힌 것이 뚫리는 일일 텐데 내 작품이 순환의 느낌을 줬으면 하는 열망이 있어요.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지난 6~7월 뉴욕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 특별전 <Origin, Emergence, Return(기원, 출현, 귀환)> 당시 말씀이죠? 록펠러센터의 중심인 채널 가든에 놓인 높이 6.8m, 폭 4.5m, 무게 3.6톤의 검은 숯 더미 형상의 조각 ‘불로부터(Issu du feu)’는 주변의 소란이나 혼잡을 잠식할 정도로 침묵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아니시 카푸어, 우노 론디노네 등 동시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 상징적인 장소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 참여했다는 사실과 고층 빌딩 사이에 놓인 숯이 지닌 상징성, 소멸과 치유의 메시지가 어느 때보다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앞서 언급하신 순환의 의미를 담은 탁월한 공간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장에 숯 세 덩어리를 쌓았는데, 무언가를 쌓는 행위는 염원을 의미하거든요. 인류가 만들어낸 고도의 문명이 집약된 맨해튼 한가운데에 숯을 쌓음으로써 어떤 새로운 의미들이 발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자연과 문명의 대비라 할까요. 아마 그 작품이 청도에 세워졌다면 그 의미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텐데, 도시 중앙에 서 있으니까 의미가 전환되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순환에 대한 의식은 코로나19를 지나오며 더 확고해졌나요? 그렇죠.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봐요. 아름다움이라 하면 조화, 균형 등 미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크게 바뀌었다고 봅니다. 막연한 아름다움보다는 의미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죠. 의미, 그러니까 앞서 말한 이 작업을 왜 하는가 하는 질문이 주효할 테고요.

순환을 의식하는 행위는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십니까? 성찰, 수행, 순환의 의미가 귀하게 다가오는 시대입니다. 순환은 자기와 바깥을 연결하는 시도에서 시작되죠. 자기 속에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밖으로 열어나가는 게 순환의 시작일 거예요. 예술가는 어떤 순간에 형식이나 방법론에 대한 탐구나 완성에 몰두하기 마련인데, 이와는 다른 의미로 바깥으로 시각을 열어가야 하겠죠. 인류가 인간중심주의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사고와 의지가 더욱 중요해지지 않았습니까. 이 과정에서 외부로 향하는 통로를 우리도 모르게 막아버린 겁니다. 작업이 외부와 소통하는 도구로써 그 의미를 더 확장해 나가야겠죠. 저에게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기에 몰두하고 또 자기 안에 침잠하는 시간을 지나온 이만이 할 수 있는 생각 같습니다. 보통 예술가의 덕목으로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것, 그리고 자기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것을 꼽아왔는데요. 예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실제로 완전한 예술을 마주한 사람도 없을 테고, 예술을 완전하게 해낸 사람도 없을 겁니다. 예술이 무엇일까? 이게 예술이 되지 않을까? 질문하고 시도하며 찾아가는 거죠. 예술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앞에 두고 작가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갈지 판단하고 움직이게 하는 건 시대정신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예술가의 삶에 당시 환경이나 여건이 알게 모르게 배어들 테니까요. 팬데믹을 지나오며 우리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당장은 정의할 수 없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당시 예술가들이 이런 고민을 했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아요.

큰 변환이 있겠지요? 큰 변화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예술은 인류가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어느 매체보다 빠르게 제시한다고 봐요. 예술은 가변적이고 진실되죠. 그 특수한 가변성과 진실성이 변화에 빨리 적응하도록 만듭니다. 그뿐 아니라 예술은 사람들의 생각을 빠르게 수용하고 적용하기에 수월한 매체입니다. 정교한 구조를 만들고 견고해야만 값어치를 얻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작품에서 예술의 변용성, 예술가의 변화는 굉장히 중요한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매 순간 변화하기 위해 애쓰고 방법을 세련되게 다듬어야 합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고요. 변화하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 괴로운 거지.(웃음) 애쓰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