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쟈뎅 드 슈에뜨 디자이너로 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돌연 잉크를 론칭한 계기가 있다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잉크를 시작하게 된 것 같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지금에 이르렀다.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도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리고 친구들의 요청으로 나만의 액세서리나 옷을 만들곤 했다. 한마디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직업이자 취미였다. 그러던 중 주얼리를 장식한 비니를 만들어 플리마켓에서 판매했는데, 그게 잉크의 첫 컬렉션이 되었다.
잉크라는 이름이 매력적이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인쇄소를 운영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책뿐이 아니라 텍스트, 종이, 인쇄물 그리고 무엇보다 비주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친구의 집에 가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먼저 찾아 보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언젠가 내 브랜드를 갖게 된다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 생각해보니 ‘잉크(ink)’라면 이런 취향을 대변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영문 이름(Lee Hye Mee)에 알파벳 ‘e’가 많이 들어가는 데서 착안해, 약간의 위트를 더해 철자를 바꿔 잉크(EENK)로 정했다.
여성복을 비롯해 남성복, 아동복, 액세서리 등 패션의 다양한 범주를 넘나들며 일해온 것으로 안다. 이런 다양한 이력이 잉크를 이끌어나가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다. 예전에는 다양한 이력이 부정적인 인상을 주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요즘은 브랜드와 개인, 혹은 장소까지도 멀티플레이가 가능해야 살아남는 시대다. 여러 분야를 섭렵한 덕분에 잉크를 통해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일 수 있어서 좋다. 시대를 잘 타고난 것 같다.(웃음)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또래 여자들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가지고 싶고 필요한 아이템을 고민하고 디자인을 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변 친구들의 의견도 많이 듣는 편이다. 처음 잉크를 론칭할 때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구성된 컬렉션을 만들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빈티지 아이템에 푹 빠져 있는데, 바로 희소성과 특정 시대를 대변하는 드라마틱한 요소 때문이다. 지금 입고 있는 블라우스도 파리 생투앙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20년 된 빈티지 제품이다. 잉크도 이 빈티지 아이템처럼 동시대 여성의 이미지가 담긴 너무 흔하지 않은 제품들로 채워나가고 싶다.
B부터 알파벳 순서대로 아이템을 소개하고 있는 ‘레터 프로젝트’가 ‘B for Beanie’로 시작해 ‘F for Fedora’로 이어졌다. 이제 알파벳 G의 차례다. ‘G for Gold’를 테마로 온라인 편집숍 베리 커먼(Very Common)과 함께 금색 아이템을 준비 중이다. 리빙 제품을 비롯해 액세서리까지 다양한 제품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더불어 10월 초에 정식으로 쇼룸을 오픈할 예정인데, 금색을 메인으로 인테리어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쇼룸의 인테리어 또한 이번 컬렉션에 포함되니 기대해도 좋다.
첫 번째는 아티스트 김병수, 포토그래퍼 구송이와 룩북을 만들었고, 뒤이어 아트먼트뎁, 리타 등 여러 브랜드와 거의 매 시즌 콜라보레이션 라인을 선보여왔다. 특별히 협업을 즐기는 이유가 있나? 협업을 하면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물들이 탄생한다. 타인과 공동 작업을 하며 배우는 것도 많고, 그 덕분에 늘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어 좋다.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만들어내는 걸 보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앞으로 잉크의 행보가 기대된다. 내년 초에 aA 디자인 뮤지엄과 함께 브랜드 잉크를 주제로 한 전시를 열려고 기획하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잉크를 사랑해주길 바라며 이숍(e-shop)을 새롭게 론칭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