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F/W 시즌 파리 패션위크 기간, 지방시는 어쩐지 익숙한 디자인의 27개의 룩을 공개했다. 2010년에 공개한 미니스커트 룩과 2013 S/S 시즌에 선보인 러플 장식 원 슬리브 튜닉 등 올해 2월 하우스를 떠난 리카르도 티시가 12년간 하우스에 남긴 주옥같은 작품이었다. “티시를 대변하는 동시에 위베르드 지방시의 코드를 상징하는 옷으로 엄선했습니다.” 지방시 글로벌 PR 담당자의 설명이다. 비슷한 시기에 드리스 반 노튼은 자신의 1백 번째 컬렉션을 기념하는 컬렉션을 준비했다. “감상에 젖고 싶지 않았어요.” 요란한 축하 행사와 시끌벅적한 파티 대신 그는 자신이 그간 발표한 아이코닉한 패턴을 새롭게 해석한 의상을 무대 위에 올렸다. 남성적인 테일러링과 루스한 실루엣, 여유로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야말로 2017년을 위한 아카이브의 환골탈태!
“이브 생 로랑이 되려고 애쓰지 마세요.” 자신의 브랜드를 정리하고 생 로랑 하우스에 입성한 안토니 바카렐로에게 이브 생 로랑의 오랜 동반자 피에르 베르제의 말은 부담감을 더는 결정적인 한마디였다. 덕분에 바칼레로는 방대한 아카이브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하우스의 역사적인 르사주(정교한 비즈 자수 공방)에 몰두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보라색 꽃 모티프 비즈를 데콜테에 장식한 미니드레스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한 방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우스 창립 1백 주년을 맞아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의 상을 대거 오마주한 뎀나 바잘라아 역시 마찬가지. 흑백사진 속 코트를 움켜쥔 모델의 포즈에서 영감을 얻은 비대칭 코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쇼 후반부에 등장한 9벌의 쿠튀르 드레스가 감탄을 자아냈으니까. “창립자의 의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어요.” 가볍게 흩날리는 깃털과 주름 장식, 풍성한 실루엣은 1950년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발표한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하지만 여기에 큼직한 바자 백, 네온 컬러 레깅스 부츠를 더하면? 우아함과 쿨함의 완벽한 균형을 느낄 수 있는 2017년 식 발렌시아가 룩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에게도 무슈 디올의 의상은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디자이너의 임무만큼이나 큐레이터의 역할을 중시해야 합니다.” 거대한 규모의 아카이브에서 근사한 것을 채집하는 일이 그녀의 의무인 셈이다. 일례로 크리스찬 디올이 1948년 발표한 후디드 투피스는 이번 시즌 디올 런웨이에 거듭 등장한 단골손님이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벨벳과 부드러운 울처럼 가벼운 소재를 쓰거나 한결 넉넉하게 실루엣을 변주해 컬렉션을 완성했다. 현대 여성을 위한 아카이브 전성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하게 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