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규모의 경마장이 있는 프랑스 샹티이에서 열린 2019 디올 크루즈 컬렉션.

지난 5월 25일 2019 디올 크루즈 컬렉션으로의 초대를 알리는 알림이 이번 컬렉션을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울렸다. ‘Dior Cruise 2019, 25 Mai 2018 A 20 Heures, Grandes Écuries du Domaine de Chantilly’. ‘Chantilly?’ 선뜻 발음하기 어려운 샹티이는 프랑스 파리에서 북쪽으로 42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과 19세기에 지어진 승마장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디올이 크루즈 컬렉션의 쇼장으로 선택한 곳은 도멘 드 샹티이(Domaine de Chantilly) 안의 거대한 경마장. 크루즈 컬렉션과 경마장이라니?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도착한 쇼장은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불을 환하게 밝힌 원형(경마장일 것이 분명한) 쇼장에 도착하니 의문이 풀렸다. ‘디올로데오(Diorodeo)’, 얼마나 근사한 이름인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거친 남성들의 스포츠로 꼽히는 로데오에서 대체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일까? 쇼가 시작하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에 사람들의 걱정과 묘한 흥분이 극에 달할 즈음이었을까,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여러 무리의 하얀 말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말들을 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멕시코 여성 로데오 기수인 에스카라 무사! 챙 넓은 모자와 화려한 레이스 장식의 풍성한 풀 스커트 차림으로 말을 모는 에스카라무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1950년대부터 이전까지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던 차레아다(로데오가 단순히 길들지 않은 말이나 소의 등에 올라타 오래 버티는 경기라면, 차레아다는 달리는 말을 아홉 가지 기예를 선보이면서 잡고 팀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야성미 넘치며 우아하고 격식 있는 멕시코의 전통 승마다)에 여성 기수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풀 스커트에 화려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말이에요! 저는 이 모습이 무척 디올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이번 크루즈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에스카라무사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로데오 기수단인 에스카라무사는 거칠어 보이는 남성 스포츠를 여성미를 잃지 않고 자신들만의 우아한 스타일로 승화하고 있어요. 이 점이 저를 사로잡았죠. 이들이 완벽하고 정확하게 안무를 할 수 있는 건 엄격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에요. 디올 컬렉션도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모든 것을 지시하진 않지만 디올 아카이브에서 라이딩 재킷을 찾고, 다양한 소재를 살펴보면서 현대적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룰이 필요하거든요.”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노하우와 규칙이 있으며, 공동체를 이루는 여성들의 결속력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에게 다양한 면에서 영감을 선사한 듯하다. 그 때문일까? 이번 디올 크루즈 컬렉션은 전형적인 제조 방식을 따르는 소재들을 현대적인 기술로 재해석한 룩을 대거 선보였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에서 발달한 고전 기법인 자연 풍경이나 인물의 모습을 회화적인 날염 무늬로 표현하는 투알 드 주이(Toile de Jouy)를 발전시켜 호랑이, 곰, 기린 등 야생동물과 목가적 풍경을 마치 조각하듯 다양한 의상에 손과 펜으로 그린 것. 전통적인 색조인 블루, 레드, 그린으로 시작해 캐멀, 블랙 같은 색을 가미하고 재해석한 이 원단은 트렌치코트, 재킷, 스커트, 진 그리고 가방의 소재가 되었다. 또 재패니즈 코튼 소재의 재킷은 다양한 형태의 팬츠와 스커트, 그리고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1948년 봄·여름 컬렉션을 위해 디자인한 오트 쿠튀르 애프터눈 드레스인 드‘ 래그(Drag)’ 모델을 연상시키는 플리츠 스커트들과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컬렉션에는 레이스 제작으로 유명한 샹티이 지역의 노하우도 반영됐다. 특히 가벼우면서도 풍성한 레이스가 서로 겹치면서 생기는 특유의 투명감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롱 드레스를 돋보이게 해주었으며 블라우스의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비가 올 것을 예견한 것은 아니겠지만, 영민하게 매치한 러버 부츠는 현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성을 드러내는 듯했다(비에 젖은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 러버 부츠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화이트와 스트라이프 버전의 남성적인 셔츠에 세련된 블랙 넥타이가 더해진 룩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개인적인 스타일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 외에도 컬렉션 초반에 등장한 에스카라무사 복장에서 영감 받은 멕시코 자수를 드레스와 페티코트에 그래픽 자수로 수놓고 블랙과 화이트로 표현해 현대적인 변화를 꾀하는 한편, 허리를 강조한 넓은 가죽 벨트와 볼륨감을 살린 튈 스커트, 빅토리안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블랙과 아이보리 컬러 양가죽 톱에서는 디올 하우스다운 오트 쿠튀르의 혈통을 지키겠다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고집스러운 면모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특유의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더한 2019 디올 크루즈 컬렉션은 언뜻 승마라는 한정된 주제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랑스 남부부터 라틴아메리카,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는 독립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컬렉션을 보고 나니 컬렉션마다 자신의 패션 스타일과 여성관을 녹여내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컬렉션을 소개하는 팸플릿 첫 장에 써넣은 글이 비로소 이해됐다.

“여기에 소개하는 각각의 여성은 한 명인 동시에 여러 명이고, 그녀 자신인 동시에 수많은 다른 여성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알려져 있거나 그보다 유명하지 않은 여성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항상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니콜 로로(Nicole Loraux)의 <La Grèce au Féminin>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