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EL

샤넬의 쿠튀르 컬렉션은 쇼 시작 전 그랑 팔레에 꾸민 세트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올해의 주제는 ‘파리의 거리’였다. 평소파리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온 칼 라거펠트가 애서가들과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산실인 문학적인 파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 특히 프랑스 학사원을 뒤에 둔 센 강변의 부키니스트들이 운영하는 가판 서점의 모습은 쇼가 시작되기도 전에 프레스들의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화제가 되었다. 한편 컬렉션은 쿠튀르의 화려하고 꿈꾸는 듯한 느낌 대신 파리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센강의 돌담 색을 그대로 담은 듯한 롱 코트, 튤립 슬리브의 레딩고트, 수트, 미니드레스가 조금씩 다른 그레이 컬러를 입고 있었고, 트위드, 시폰, 레이스 등 가느다란 실루엣이 주를 이루었다.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바로 지퍼 장식. 지퍼를 소매가 좁은 재킷과 스커트 옆선을 따라 다는가 하면 재킷과 스커트 전체의 선을 따라 달기도 했다. 지퍼는 매우 우아한 룩을 완성하는 데도 한몫했다. 롱스커트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에 단 지퍼 사이로 미니스커트가 보이는가 하면 재킷의 지퍼는 허리선을 강조하고, 팔에 단 지퍼 사이로 롱 핑거리스 장갑이 드러났다.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메트로폴리탄적 삶을 지향하는 젊은 파리지엔들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모델들이 부티를 신고 경쾌하게 센 강변을 누비던 쇼가 하이라이트에 이르자 이브닝드레스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화려하고 과장된 디테일 대신 가슴 부분에만 자수나 리본을 장식하고, 하늘거리는 시스루나 실크 소재의 드레스는 다소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오히려 더 눈길을 끌었다. 쿠튀르 쇼는 전통적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대미를 장식하는데, 이번에는 백인 모델이 아니라 흑인 모델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피날레 무대에 섰다. 샤넬 쇼에서 유색 인종 모델이 특별한 역할을 맡은 것은 15년 전 흑인 모델 알렉 웩 이 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전체적으로 칼 라거펠트가 꿈꾸는 판타지를 담은 패션은 없었지만, 파리의 거리를 그랑 팔레에 그대로 옮겨놓을 사람은 그뿐이니, 꿈은 다음을 기약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