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스토리로 감동을 전하는 한편, 상상 그 이상의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놀라움을 선사하는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패션계와 긴밀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서로 무한한 영감을 주고받으며 상생의 관계를 이어온 영화와 패션, 그 사이에서 단단히 자리 잡으며 두 분야 모두를 빛낸 인물 중 가브리엘 샤넬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영감을 얻기도 한 가브리엘 샤넬은 특히 영화계와 친분을 쌓아 다양한 배우, 감독들과 소통했다. 역사에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 기록된 1929년의 대공황 이후, 전 세계는 길고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극심한 침체기를 겪게 된다. 영화와 패션계 역시 이 거대한 조류를 피할 수는 없었다. 대공황 시기에 MGM 스튜디오의 소유주 새뮤얼 골드윈(Samuel Goldwyn)은 침체된 미국 영화를 재건하고 영화 팬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1930년 가브리엘 샤넬에게 러브콜을 보내 자신이 관리하던 스타들을 일상은 물론 스크린에서도 남다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혁신적인 모험가이자 예술가답게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가브리엘 샤넬은 1931년 뉴욕을 경유해 특별 전세 열차를 타고 LA로 향했고, 그녀를 직접 마중 나온 전설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만났다. 이 만남은 유명 신문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할만큼 기념비적 순간으로 회자된다. 가브리엘 샤넬의 첫 미국 방문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고 후일 샤넬의 절친한 친구가 된 마를렌 디트리히와 글로리아 스완슨,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조지 쿠커 등 다른 스타들도 샤넬을 만나기를 열망할 정도였다. “오늘부터 내 커리어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1931년 3월 17일, <로스앤젤레스 이그재미너>와 나눈 인터뷰에서 미국 영화계에 야심 차게 뛰어든 샤넬의 포부와 자신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이 꿈같은 시간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이는 화려함을 열망하는 할리우드 스타일과 절제되고 세련된 스타일을 추구하던 가브리엘샤넬의 철학이 극명하게 엇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샤넬은 포토제니(photogénie)라는 개념과 더불어 영화 의상이 어때야 하는지 간파하고 있었고 이는 꾸뛰리에로서 샤넬의 작품에 영원히 녹아들었다. 할리우드에서는 샤넬의 스타일이 각광받지 못했지만 다행히 프랑스 영화계는 샤넬의 아우라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화 <안개 낀 부두>에서 열연한 미셸 모르강이 샤넬에게 특별 드레스를 부탁하자 전형적인 드레스 대신 파리지엔의 시크한 멋이 돋보일 수 있는 레인코트와 베레모를 적극 추천했고, 이 스타일이 ‘대히트’를 친 건 유명한 일화다. 이뿐 아니라 로미 슈나이더 역시 샤넬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는데, “처음 샤넬을 입었을 때 앞으로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략) 샤넬은 세상 둘도 없는 꾸뛰리에다. 일관되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완전체다”라고 열변을 토할 만큼 샤넬의 열렬한 지지자를 자처했다. 이처럼 샤넬이 지닌 독보적 매력과 특유의 아우라는 자연스레 누벨바그 영화계의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샤넬 특유의 세련되고 심플한 멋은 떠오르는 감독과 배우들의 세계에 완벽히 맞아 떨어졌다. 1960년 감독 알랭 레네는 샤넬에게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에서 델핀 세리그가 입을 의상을 부탁했다. 이에 샤넬은 영화 역사상 최초로 별도의 의상을 제작하지 않고 샤넬 오뜨 꾸뛰르 컬렉션의 의상을 사용해 현실에 가까운 영화 의상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선보였다.
칼 라거펠트 역시 프랑시스 베베르부터 릴리로즈 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배우나 감독과 깊은 우정을 나눴으며, 베베르의 영화에서는 직접 숨겨둔 연기 솜씨를 펼치기도 했다. 평소 영화를 통해 빛나는 영감을 얻은 그가 1952년 파리에 도착한 후 프랑스어를 마스터한 곳 또한 라탱 지구의 영화관이었고, 2007년 <스튜디오>와 나눈 인터뷰에서는 “영화가 내 인생을 채웠다”라고 전할 만큼 영화에 지대한 애정을 쏟았다. 영화와 패션의 긴밀한 관계와 영향력을 일찍이 간파한 그는 198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소피아 코폴라가 샤넬 인턴을 마친 후 영화 <뉴욕 스토리> 속 10대 배우들에게 샤넬의 의상을 입히며 칼 라거펠트가 개척하고자 한 ‘젊은’ 샤넬의 이미지 메이킹에 힘을 싣는 데 성공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영화 속 여배우들과 샤넬의 기념비적 협업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하이힐>, 프랑코 제피렐리의 <칼라스 포에버>에도 샤넬 룩이 등장하며 영화의 명장면을 장식한다. 아이코닉한 여배우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칼 라거펠트의 영향력은 놀라운 협업으로 이어진다. 2016년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에 등장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블레이크 라이블리를 위해 칼이 특별히 일부 의상을 제작한 것은 물론 진귀한 하이 주얼리도 적극 제공했다. 2018년 <마담 싸이코>의 주연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는 영화 속에서 2016/17 공방 컬렉션 제작 수트를 입고 등장했고,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 속 마고 로비는 하우스 앰배서더답게 샤넬 컬렉션을 입고 열연을 펼친다. 의상뿐 아니라 샤넬 주얼리 컬렉션도 스크린 속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발한다. 1932년 선보인 하이 주얼리 컬렉션 ‘비쥬 드 디아망’의 복각판을 착용한 <고스포드 파크> 속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코코 크러쉬 주얼리 모델인 키이라 나이틀리,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클로이 모레츠 등이 샤넬 의상과 주얼리를 착용했다.
2022년, 버지니 비아르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영화를 향한 샤넬의 애정은 보다 다양하고 참신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지난 2019/21 파리 깡봉가 31번지 공방 컬렉션 런웨이는 하우스의 오랜 친구인 소피아 코폴라에게 무대 장식을 맡겨 전설적인 샤넬 부티크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2022S/S 컬렉션을 관통하는 테마 역시 누벨바그 배우들의 자유로운 매력과 아름다움이었다. 이렇듯 샤넬을 이끄는 버지니 비아르의 비전에는 늘 영화적 미학이 자리하며 동시대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또 샤넬은 2018년부터 아카데미 세자르의 레벨라시옹(Revelations)사업 후원자로, 2019년부터는 도빌 아메리칸 영화제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1년 3년 연속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émathèque Française)의 주요 후원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파트너십은 영화계와 샤넬이 이어온 오랜 인연과 1930년대에 가브리엘 샤넬이 일군 감독 및 배우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재확인하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