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코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대사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진한 여운을 남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과학자의 절절한 고뇌가 느껴졌기 때문.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그린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이며 개봉 전후로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다. 영화 의상 역시 마찬가지. 특히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의 수트 패션은 동시에 개봉한 영화 <바비>와 대조를 이루며 ‘바벤하이머(Barbenheimer)’라는 밈을 탄생시켰다.
패션계에서는 ‘오펜하이머 코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이 패션에 열광한다. 넉넉하고 긴 재킷에 타이는 짧고 바지통은 넓은 하이웨이스트 수트는 오펜하이머가 UC 버클리 대학에 재직 중이던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패션을 보여준다. 그 당시 수트는 부드러운 질감에 우아한 색으로 격식을 갖추면서도 편안하고 스타일리시한 것이 특징. 이번 시즌 몇몇 브랜드에서 오펜하이머 코어가 녹아든 수트를 발견했다.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보테가 베네타, 편안한 실루엣의 아미, 오버사이즈 재킷으로 강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발렌시아가와 생 로랑 등 멋스럽게 변주한 수트는 편안한 차림이 지루해진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