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멈춘 순간, 잠시 페르소나를 벗고.
배우 김고은과 J12가 아주 고요하게 흘려보낸 어느 날.

  

개봉 중인 영화 <파묘>가 누적 관객 수 1천 만을 앞두고 있다. 좋은 연기를 꾸준히 해왔지만, <파묘>처럼 결과적으로 수치가 비례한 작품은 오랜만이다. 처음 겪어보는 스코어다. 그간 영화 흥행 면에서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실감 나지 않기도 하고 너무너무 감사하다.

숫자에만 매달릴 건 없지만 대중 배우이기에 관객 동원력이라는, 숫자가 지닌 힘도 무 시할 수 없다. 배우로서 어떤 갈증이 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의 기쁨을 충 분히 누리고 있나? 사실 손익분기점을 넘은 뒤로는 수시로 수치를 확인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기쁘고 다행스럽고 행복하지만, 지금 촬영 중인 작품에 그 영향이 미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현재에 집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를 빨리 제자리로 돌려놔야 하는 상황이다.

배우 김고은의 연기를 두고 ‘캐아일체’라고 표현하더라. 캐릭터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불리는 것이야말로 많은 배우의 최종 목표일 것이다. 역할마다 접근법은 다를 테지만, 큰 맥락은 있을 것 같다. 영화 <파묘>의 ‘화림’에 어떻게 다가갔나? 화림은 직업적 특성이 전면에 나서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어설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캐릭터의 성향 등은 대본에 나와 있는 부분 이외에 반존대를 하는 등 내가 덧 붙인 면이 있지만, 나머지는 직업인으로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디테일하게 연기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굿을 하고 경문을 외우는 등 퍼포먼스적 접근 외에 심리적 숙제는 없었나? 지관, 장의사, 무속인을 직업인으로서 예우한다는 인상도 영화 전체에서 느껴진다. 무속 신앙에 무지했기 때문에 무속인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직업 정신이 투철한 분들이라는 점을 깊게 느꼈다. 저마다 사명감이 있고, 그 사명감을 품은 채 직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무속인이라 해서 특별하고 낯선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나 역시 직업적 마인드로 화림에게 다가갔다. 왜 무속인이라 하면 보자마자 나를 꿰뚫어 볼 것만 같지 않나. 하지만 실제로 만나니 일하지 않을 때는 친근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화림의 롤 모델로 삼은 젊은 무속인 분과는 자매처럼 하루 종일 수다를 떨기도 했다. 만난다고 해서 뭘 연습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밥 먹으러 가기도 하고 마당이 넓어서 강아지 뛰어놀게 하려고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 징 좀 치고. 커피도 마시고 술도 한잔 하면서.

영화를 보다가 새삼 이 세계가 철저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큰 존재들 속 인간은 미물 중의 미물 아닌가. 연기하는 배우에게 이 점이 더 절실히 다가오지 않았을까?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보이지 않는 것까지 고려하기보다는 지금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하는 일에서 한 발 한 발 앞을 보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죽음으로 한 존재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정도의 믿음은 있다. 인간이 우주의 끝이나 바다 심연까지 가본 적이 없는데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현재 기술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지금의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저 오늘 하루 건강하게 살고,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이 최선 아닐까.

<파묘>를 지나오며 자신에게 무엇이 남은 것 같은가? 또 하나의 장르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남을 것 같다. 어떤 캐릭터가 잘되고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 그와 결이 유사한 시나리오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과거 센 역할을 했을 때는 이후 스릴러가 주로 들어왔고, 드라마 <도깨비>를 하고 나서는 멜로물을 많이 제안받았다. 그 때문에 얼마간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파묘>가 배우로서 다른 결을 보여줄 기회가 됐다. 보다 다양한 인물을 맡을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할 계기나 기회가 되지 않을까? ‘흥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필모그래피가 생겨 감사하다.

  

  

연기한 지 10여 년이 지났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결과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변하고 있다고 느끼나?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방향성은 변하는 것 같다. 당시엔 정답인 것 같던 방향도 다른 경험을 하며 바뀌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중 문화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보고, 흥행 면에서 잘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어느 작품이든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 작품에 담아내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시작된 거니까. 현장에서 누구 하나 자기 분야에서 허투루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 곳에 있다 보면 이들의 노력이 빛을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저절로 생긴다. 그래서 외면받을 때 참 속상하다. 늘 평가받는 자리이고 호 불호는 당연히 갈릴 수 있지만, 배우로서 갖는 마음은 그렇다. 흥행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남는 건 있다. 많은 이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성장도, 발전도 있을 거다. 그런데 이런 건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느끼는 점이다. 어떤 결과든 얻어간다고 생각하면 분명 얻는 게 있다.

작품마다 얻은 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편인가?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그 장면에서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 상황에서는 내가 이렇게 컨트롤했어야 하지 않나 하며. 하지만 ‘내가 발전 했구나’ 하는 느낌은 당장 드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성숙하거나 유연해진 부분이 순간적으로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때서야 ‘그래도 성장했네’ 하고 느끼게 되는 거다.

흥행 여부처럼 실시간으로 판단되는 성과가 있는가 하면, 뒤늦게 느끼는 개인적 성취도 있다는 점에서 배우의 일은 참 오묘하다. 배우뿐 아니라 많은 분야가 그럴 것 같다. 운동선수도 그렇지 않나. 오늘 하루 열심히 운동한다고 그만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연습해야 하나의 테크닉을 익힐 수 있다. 계속 작품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연기가 달라진 걸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연기 외적으로도 어떤 상황에 대처했을 때, ‘내가 이렇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됐네’ 하고 느끼기도 하고.

가시적 성취는 대중에게 드러나는 반면, 스스로 느끼는 무형의 성취는 무척 내밀하다. 그 낙차를 경험하는 것이 배우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 나 스스로는 타인이 봤을 때 엄청 큰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저렇게 데뷔할 수 있지 싶게 데뷔했고(김고은 배우는 영화 <은교>에서 주연을 맡아 상업영화에 발을 들였다), <도깨비>처럼 잘된 작품도 있다. 데뷔작이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었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화였기 때문에 (주연배우로 시작했다는 기쁨 또는 상업적 성공 보다는) 배우로서 다른 작품을 해나갈 발판이 마련됐다는 안도감이 컸다. 시작이 그랬기 때문인지 크게 잘돼도 들뜨지 않고, 안됐을 때도 확 꺼지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장기전이다. 그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 배우라는 일과 다른 직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중에게 보여진다는 것일텐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마음과 정신을 잘 다스리고, 조금이라도 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일 터다. 이건 아마 이 분야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고, 힘든 부분일 텐데 내가 찾은 나만의 방법인 거다.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내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니까. 자기최면 같은 것일 수 있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점점 많은 게 보이지 않나. 만족의 역치는 사람마다, 시기 마다 다를 것이다. 자기만족의 기준도 점점 높아진다고 느끼나? 똑같다. 한결같이 어렵다. 모든 작품의 초반 촬영분은 다 불태우고 싶다.(웃음) 지금도 그렇다. 매번 새 작품, 새로운 인물이 주어지니까 나에게는 늘 새로운 숙제인 거다. 윤여정 선생님도 예순 살이 돼도, 일흔 살이 돼도 다 똑같다고 하셨다. 더 편하고 쉬워지는 거 전혀 없고, 할수록 더 힘들고 어렵다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모두가 배우 김고은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건가?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내가 내 연기에 만족하기 시작하면 옆에서 정신 차리라고 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웃음) ‘지금 너 길 잘못 가고 있어. 내려와’ 하고. 특정 장면이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이번에 나 잘한 거 같다’ 하면 잘못 가고 있는 거다. 그래서 옆에서 따끔한 말을 해줄 좋은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내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