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장 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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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NO

매 시즌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가 제시하는 발렌티노의 비전은 명확하다. 초현실적 로맨티시즘. 올가을에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한 테일러링과 아름다운 패턴 플레이는 여전했지만, 발렌티노의 여인들은 한층 더 성숙해졌다. “성별, 나이, 사이즈 등 그 어떤 요소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 인류를 위해 숭고한 컬렉션을 창조해냈죠.” 그 결과 피치올리는 발렌티노의 DNA를 담은 새로운 유니폼 코드를 정립했다. 고스풍 블랙 드레스를 기반으로 풍만한 실루엣을 감싸는 가죽 코르셋, 바닥에 끌릴 만큼 긴 맥시 가운 등 다양한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헐렁한 슬라우치 팬츠 수트며 커다란 장미꽃을 곳곳에 수놓은 아이템, 색색의 시퀸을 촘촘히 장식한 룩을 선보인 것. 극도로 로맨틱한 드레스에 청키한 플랫폼 부츠를 매치하거나 메가 사이즈 백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런웨이를 걷는 여인들은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여기에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라이브 연주까지 더해졌으니! 발렌티노의 로맨티시즘은 이렇게 또 한 단계 진화했다.

CELINE

피비 필로가 독자적인 레이블 론칭 계획을 밝혔기 때문일까? 새 시즌 셀린느 쇼를 찾은 관객의 대화에서는 올‘ 드 셀린느’를 향한 집단적인 향수와 애착이 제법 잦아든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에디 슬리먼은 이전 시즌에 비해 다양한 디자인을 공개했다. 슬림한 실루엣의 팬츠나 꽤 오랜 시간 런웨이에서 자취를 감췄던 하프 코트, 프릴이나 리본을 장식한 블라우스와 그의 전매특허인 마이크로미니 사이즈 가죽 재킷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고상하다는 인상을 주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1970년대의 부르주아 스타일에도 완벽하게 부합했다. 에디 슬리먼은 어마어마한 마니아 군단을 이끌던 브랜드를 일말의 타협 없이 자신의 색으로 바꿔놓은 데 이어, 그에 따른 반발심(?)까지 몇 시즌 만에 잠재우며 스타 디자이너의 면모를 내보였다.

PACO RABANNE

줄리앙 도세나는 이번 시즌 영웅 잔 다르크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강인한 여성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중세 밀리터리 룩에 레트로 무드와 그런지한 요소를 더해 컬렉션을 완성했어요.” 군복 실루엣을 차용한 코트에 로코코 양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꽃 자수를 더한 오프닝 룩만 봐도 디자이너의 명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보헤미안풍 태피스트리 패턴과 정교한 프린지로 포인트를 준 니트 드레스, 메탈릭한 시퀸 엠브로이더리 장식 룩, 코쿤 실루엣 케이프 코트 등 매혹적인 룩이 컬렉션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토록 고혹적으로 변형한 중세 스타일이라니, 프런트 로에 앉은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 건 당연해 보였다.

MARINE SERRE

마린 세르는 팬데믹에 빠진 세계를 위로하기 위해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마스크를 제작하는 등 유독 환경에 관심이 많다. 지난 시즌 기후변화에서 살아남은 인류를 주제로 컬렉션을 펼친 그녀는 이번 시즌 프랭크 허버트의 공상과학소설 <듄(Dune)>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도마뱀 프린트가 빼곡히 자리 잡은 보디수트, 팔레스타인의 전통 터번 카피예를 본뜬 헤드피스, 아워글라스 실루엣 코트 등 다양한 룩이 탄생했다. 물론 크리스털, 하운드투스 체크 등으로 장식한 마스크와 곳곳에 부착한 미니 무아레 백, 헴라인에 깃털 프린지를 단 코트 등 다소 심도 깊은 주제에 위트를 더할 만한 요소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기대해도 좋아요.” 마린 세르는 이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어린이들을 런웨이에 등장시켰다. 아들을 목말 태운 채 씩씩하게 걷는 모델 안로르 너츠의 모습을 보라.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HAIDER ACKERMANN

“현존하는 원시 부족의 스타일을 재해석했어요.” ET의 길고 둥근 머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위로 크게 부풀린 가발을 쓴 모델들은 여느 때처럼 잘 재단된 맥시 코트와 턱시도 수트를 입은 채 우아하게 런웨이를 걸었다. 뉴트럴 컬러를 기조로 지그재그 라펠로 포인트를 준 블레이저, 일본 전통 의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지오메트릭 패턴 재킷, 길고 날렵한 핏의 가죽 팬츠 등 모든 컬렉션 의상의 테일러링은 여느 때처럼 완벽했고 소재도 고급이었다. 그러나 하이더 아커만이 평소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모아놓았다는 느낌만 강하게 들 뿐 신선하거나 충격적인 부분은 전혀 없었다. 쇼가 끝난 후 프런트 로에 앉은 배우 티모시 샬라메만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 요소가 부재했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ALTUZARRA

알투자라가 표방하는 로맨티시즘은 이번 시즌 한층 더 우아하고 성숙해졌다. “1940년대에 중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할머니의 옷장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레트로풍의 글래머러스한 옷이 많았죠.” 그 결과 청삼을 변형한 플로럴 프린트 드레스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관전 포인트는 관능미를 부각한 디테일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 포트레이트 칼라를 비롯해 깊게 파인 V 네크라인, 과감한 슬릿, 컷아웃 등 많은 요소가 알투자라의 레이디라이크 룩을 진화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메탈릭한 크링클 원피스나 그레이 멜란지 트위드 코트 드레스 등 다소 베이식한 아이템에 위트를 더해 한 끗 차이를 만들어낸 것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걸을 때마다 곱게 나부끼는 깃털 프린지 장식 클러치 백과 벨트, 색색의 복슬복슬한 퍼로 뒤덮인 슈즈 등 구매욕이 불끈 솟게 하는 액세서리까지 가세했으니. 알투자라가 구현한 가을 룩에 매료될 수밖에!

JUNYA WATANABE

준야 와타나베는 이번 시즌 ‘섹시함’에 대해 깊이 고찰했다. 그 결과 브랜드의 DNA인 펑키 무드와 위트를 가미한 룩이 줄줄이 등장했다. 헝클어진 듯한 금발에 레드 립스틱을 번진 듯하게 바른 모델들은 흡사 전설의 록 스타 코트니 러브와 데비 해리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실루엣을 다양하게 변형한 글로시 가죽 아이템, 관능적인 애니멀 프린트 룩을 입고 런웨이를 누볐다. 특히, 힙 라인을 빵빵하게 부풀린 스커트의 구조적인 실루엣은 압도적이었고, 비대칭 가죽 풀 스커트에 풍성한 튈을 달아 포인트를 준 뷔스티에 드레스도 인상적이었다. 가죽 본디지 스트랩을 곳곳에 달아 페티시즘을 드러낸 준야 와타나베의 감각은 또 어떤가! 거장의 노련미가 빛을 발한 쇼였다.

RICK OWENS

패션계에서 릭 오웬스는 괴짜로 통한다. 그의 쇼는 상업성을 철저하게 배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적인 쿠튀르 정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건축적인 조형미에 치중한 컬렉션을 선보이는 탐미주의자인 동시에 정치적 의견을 쇼의 중요한 테마로 내세우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종잡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그가 새 시즌 쇼를 통해 선보인 옷들-무릎 위로 길게 올라오는 가죽 부츠나 그래픽적인 패턴이 그려진 오버사이즈 코트, 독창적인 형태로 솟아오른 어깨 장식과 미래적인 선글라스는 모델들을 게임 속에서 걸어 나온 전사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난 시즌 쇼에서 그가 보여준 정치적 테마 때문인지 현장에 모인 프레스들은 이번 쇼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그의 의견을 궁금해 하는 듯했지만 끝내 원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