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김 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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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NI

디자이너의 피날레 인사는 보통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끝난다. 프란체스코 리소는 토끼 가면을 쓰고 런웨이를 배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했다. 쉼 없이 ‘Inside’를 속삭이던 음악도, 얼굴에 온통 페인트와 글리터를 뿌린 메이크업도, 패치워크가 난무했던 컬렉션도. 마르니를 오래 사랑한 팬이라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우리가 알던 마르니와 다른 건 사실이니까. 이번 컬렉션은 원단 조각에서 시작됐다. 재활용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패션을 꿈꾸기보다 남아 있는 것을 아름답게 활용하는 방법을 꾀했다. 가죽, 코튼, 반짝이는 천을 꿰어 붙인 시프트 드레스, 커다랗고 긴 코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디자인했다는 베틀로 직조한 양단과 태피스트리로 만든 드레스는 앉아 있던 자리의 불편함을 잊고 쇼에 빠져들게 했다. 프란체스코 리소가 만드는 마르니는 확실히 이상하지만 아름답다.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점점 사라져가는 공방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마르니라는 브랜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 고 말했다. 그 마음에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싶다.

FENDI

우린 여‘ 성스럽다’는 말을 지양한다. 표현 자체가 품고 있는 편견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여성스러운 것에 대한 정의를 지극히 펜디스럽게 재해석했다. 영감의 원천은 1975년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미스트레스(Ma tresse)>다. 평범한 중산층 여자가 지하실에서 성적 지배자로 사는 이야기로 칼 라거펠트가 코스튬을 맡았다. 이는 지나치게 부풀린 소매, 날씬하게 강조된 허리, 엉덩이부터 무릎까지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딱 맞는 펜슬 스커트와 코르셋 톱으로 표현되어 런웨이에 올랐다. 오해를 사기 쉬운 룩이 많았다. 하지만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이를 카렌 엘슨, 팔로마 엘세서, 캐럴린 머피에게 입혔다. 깡마른 여자가 아닌 친구 같은, 아는 언니 같은, 나 자신 같은 여자에게 입혀 우리 모두 나이, 몸무게, 생김새를 불문하고 섹시하고 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펜디는 쇼 노트에 ‘안방에서부터 중역 회의장까지 소화 할 수 있는 옷이라’고 적었다. 회사 미팅 자리에 적합한지는 의문이었지만 쇼장을 찾은 몸 사이즈가 각기 다른 여자들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했다.

JIL SANDER

하얀 홀에 나무 의자가 동그란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게스트를 위한 의자는 아니었다. 아치 형태의 창문이 있는 엄숙한 분위기의 이 공간은 밀라노 산업디자인 박물관이다. 루크 & 루시 마이어가 이끄는 지금의 질샌더를 공간으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거다. 듀오는 미니멀리즘이 아닌 ‘순수’를 얘기했다. 디자이너 질 샌더는 미니멀리즘의 대표 주자다. 하지만 이 둘의 옷은 미니멀리즘과 거리가 멀다. 형태와 컬러는 단순하지만 룩 하나하나에 더해진 장인정신, 자칫 놓칠 수 있는 디테일은 보는 이를, 무엇보다 입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유연한 소재로 선이 굵은 옷을 만드는 것 역시 강점. 니트 소재의 롱 베스트와 슬릿 스커트, 송충이 털처럼 보송보송한 실로 짠 셔닐(chenille) 니트 드레스와 케이프, 무겁게 움직이던 프린지 드레스가 좋은 예다. 아무렇게나 걸쳐도 섹시할 블랙 코트, 어떤 하의와 입어도 멋질 재킷, ‘ 어디서 사셨어요?’라는 질문이 쇄도할 벌룬 블라우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릴 구원해줄 ‘히어로 피스’였다. 교회 예배당을 연상케 한 공간에서 우리는 모두 질샌더의 신도가 됐다. 이런 종교라면 발 벗고 전도할 테다.

BOTTEGA VENETA

디자이너에게도 ‘초심자의 행운’ 이 따른다고 믿는 편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보테가 베네타의 다니엘 리는 첫 시즌부터 행운이 따른 케이스. 슬슬 오‘ 픈 빨’이 떨어지는 세 번째 시즌이 그래서 중요하다. 게다가 기대치까지 높은 상태. 잔뜩 기대하는 이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결과적으로 컬렉션은 성공적이었다. 몸에 대고 재단한 듯 딱 붙는 크롭트 재킷과 늘씬한 팬츠가 눈에 띄는 남성복부터 프린지로 한껏 치장한 니트 드레스가 돋보이는 롱 앤 린 실루엣의 여성복까지, 서운한 룩이 없었다. 짙은 블랙을 메인 컬러로 정한 다니엘 리는 이제껏 보테가 베네타에서 본 적 없던 키위, 롤리팝, 스칼렛, 버터 색을 적절히 배치해 매력적인 컬러 팔레트를 완성했다. 하우스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 기법은 프린지 백과 남성복 베스트로 재해석됐고 동그란 모양의 핸드백에는 놋(knot) 장식이 더해졌다. 다시금 완판 대열에 이름을 올릴 아이템이 있느냐고? 자연 친화적인 소재로 만든 러버 부츠, 허리를 잘록하게 조인 롱 코트와 재킷, 프린지로 장식한 시어링 백이 올 가을/ 겨울 스트리트를 장악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GUCCI

얼마 전 구찌는 뷰티 라인을 출시했다. 뷰티 백스테이지에 들어가는 게 시의적절해 보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 뷰티 백스테이지를 쇼 대기 장소로 사용했기 때문. 실제 헤어 &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모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백스테이지를 만인에게 공개한 것. 서커스 텐트 같던 런웨이는 패션 백스테이지를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디자인팀 직원들은 모델들에게 바삐 옷을 입혔고 준비가 된 룩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대 끝자락에 일렬로 세워졌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을 법한 드레스, 아동복처럼 작은 미니드레스, 빈티지 숍에서 건진 듯한 청바지와 크리스털을 장식한 블라우스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이기에 가능한 스타일링으로 선보여졌다. 이걸로도 충분했지만 그는 여기에 감동을 더했다. 친필로 쓴 레터엔 ‘나의 광기 어린 마술 쇼를 현실화하는 데 손과 마음을 보태는 이들을 커튼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라고 적었다. 지금의 구‘ 찌’는 많은 이들의 숙‘ 련된 내공’과 ‘마음’이 닿아 만들어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그가 이제껏 만든 어떤 것보다 그 마음이 더 빛났다.

PRADA

백스테이지에서 나오자마자 생경한 풍경과 마주했다. 쇼장 입구 한참 앞에 세워진 바리케이드엔 PRADA♡LISA 플래카드를 든 소녀들이 가득했다. 때때로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성을 지르던 소녀들은 리사가 등장한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결력을 보여줬다.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쇼를 준비했다. “프라다는 늘 프라다에서 영감을 받아요.” 홍보 담당자의 말이다. 이번 시즌에도 프라다는 프라다가 가장 잘하는 것을 자랑하듯 보여줬다. 무게가 느껴지는 실크 태슬, 얇고 하늘하늘한 오간자 드레스와 어깨가 넓은 재킷,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한 패딩 베스트와 날렵한 펜슬 스커트, 파이핑으로 마무리한 실크 파자마 수트와 기하학적인 프린트를 가미한 슈즈. 미우치아 프라다는 여성스러움이 곧 힘이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 말을 입증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는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힘이 존중받는(받고 있다고 믿고 싶다) 지금.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여성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