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부리다 얼어 죽는다’는 패션을 둘러싼 불변의 명언도 올겨울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전망이다. 엄청난 부피의 퀼팅 코트부터 다리를 도톰하게 감싸는 워커 부츠, 두꺼운 머플러에 이르기까지 추위쯤은 거뜬히 막아줄 아이템이 런웨이에 대거 등장했으니 말이다. (하이패션과 편안함이라는 두 단어가 빚어내는 부조화는 패션계가 마치 인형놀이 하듯 미감만을 중시해왔다는 고질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기묘한 실용주의와 몇 시즌째 이어지고 있는 고프코어 트렌드의 시너지 효과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 탄생한 발라클라바는 무척 기괴한 첫인상을 가졌지만 어린 시절 종종 쓰던 스키용 방한모를 떠올리면 제법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구찌가 새 시즌 컬렉션으로 선보인 아이템은 눈과 입 부분만 뚫린 복면 형태인데, 브랜드 특유의 감각적인 색채 조화와 고급스러운 니팅 기법을 제외하면 아웃도어용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석에 가깝다. 캘빈 클라인 205W39NYC 컬렉션에 등장한 니트 방한모 역시 얼굴의 중앙만을 드러내는 원조(!)의 방식을 따랐다. 발렌시아가와 랑방, 끌로에, 마르니, 알렉산더 왕 등 유수의 브랜드 역시 비슷한 디자인을 선보였지만 헤어라인부터 후두부, 귀와 목을 감싸는 스타일로 미니멀한 매력을 강조하는 편을 택했다. 특히 프릴 장식 드레스나 견고한 실루엣의 코트처럼 어울리지 않을 법한 차림에 매치해 스타일링의 반전 매력을 꾀한 것이 특징. 반면 디올과 라코스테, 메종 마르지엘라는 후드에 챙 있는 모자를 덧댄 것 같은 스타일을 창조했다. 스웨이드, 코튼, PVC 등으로 소재는 제각각 다르지만 앞선 두 가지 스타일에 비해 훨씬 독특하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처럼 무수한 컬렉션을 살펴보며 깨달은 사실 한 가지는 발라클라바가 생각보다 다양한 분위기에 완벽하게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포멀한 수트나 로맨틱한 맥시 드레스는 물론, 어떤 룩에든 뒤집어쓰는 것만으로 힙한 감성이 더해지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방한이라는 기능적인 역할까지 무리 없이 수행하니, 발라클라바의 이유 있는 인기는 조만간 런웨이를 넘어 스트리트까지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