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의 여동생인 카트린 디올에게 장미는 자매애, 희망, 그리고 어둠을 이긴 승리를 표현한다. 저스틴 피카디(Justine Picardie)는 카트린 디올의 용기 있고 파란만장한 삶을 글로 쓴 책을 선보이며, 우리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는 그녀의 삶을 조명했다.

책 미스디올 Miss Dior

책 <미스 디올(Miss Dior)>에 나오는 감동적인 체코의 역사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체코 리디체(Lidice) 출신 여성들이 리디체의 장미를 캠프 기념관에 심어 놀라움을 자아냈다. 다른 곳에서 살아남은 수백 명의 여성들이 만든 여러 단체가 이 행보를 따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매우 놀랍고 믿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강제수용소 같은 장소에 가는 것은 작가로서도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라벤스브뤼크 자료실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체코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그 끔찍한 사건이 잊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이 일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왜 아무도 책 <미스 디올> 속 카트린 디올 같은 여성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미스 디올>은 단순히 카트린의 일생만을 그린 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는 라벤스브뤼크에 장미를 심었던 리디체 출신 여성들을 포함해 모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들 모두가 미스 디올의 근간이다. <미스 디올>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힘을 되찾은 여성들과 체코가 전쟁 중 마주한 현실, 그리고 전쟁의 공포를 겪은 이후 희망을 찾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라벤스브뤼크로 돌아가 장미를 심을 용기를 내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에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쓴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프랑스 프로방스에 있는 크리스챤 디올의 집, 라 콜 누와르(La Colle Noire)의 정원에 앉아 <미스 디올>을 구상할 때였다. 다소 전형적인 크리스챤 디올의 전기로 방향을 잡은 뒤 관련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크리스챤에게 카트린이라는 강제수용소로 추방된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바로 ‘미스 디올(miss dior)’ 향수에 영감을 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책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왜 크리스챤 디올의 전기에 카트린의 이야기가 빠져 있는지 궁금했고, 어째서 그 이야기가 사라졌는지 알고 싶었다. 남성 위주의 역사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이야기를 반드시 담고자 했다.

크리스챤 디올은 미스 디올 향수를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향으로 묘사했다. 카트린은 미스 디올에 영감을 주었지만, 그녀의 삶은 단순히 젊은 여성의 이미지 이상으로 많은 이면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카트린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일에 의해 형성된다. 카트린도 한때는 노르망디의 꽃이 만개한 정원에 자리한 장미처럼 아름답고 젊은 여성이었다. 오빠처럼 그녀도 꽃을 사랑했고,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얻는 길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카트린은 고작 열세 살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관여하던 증권거래소가 파산하며 디올 집안은 전 재산을 잃었다. 나는 이 일이 카트린에게 용기를 심어준 계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겪고 집을 떠나 오빠 크리스챤과 함께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트린은 파리의 패션업계에서 직업을 찾았고, 노르망디에 머물던 시절과 판이한 삶을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녀의 삶은 다시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전쟁을 겪으며 삶을 바꾸는 선택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타협하지만 누군가는 저항할 용기를 낸다. 그리고 이 과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당사자의 인생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카트린은 투옥의 공포에 직면하는 동시에 동지들이 상처받지 않는 방식으로 무력에 맞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카트린은 동지들을 보호하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 그녀는 추방되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운도 따라야 하지만, 스스로 살 힘을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카트린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생존자의 죄책감에 시달려 몇 번이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카트린은 살 이유를 찾아 나섰고,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크리스챤 디올의 유산인 장미를 기르며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 카트린은 어마어마하게 불행한 일을 겪었음에도 세상에는 여전히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며, 사는 내내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전쟁 중에 여성 공동체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일은 그들이 전쟁과 감옥에서 살아남는 힘이 되어주었다. 우리 여성들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 서로를 더 응원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사랑하는 여동생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항상 여성 공동체를 믿어왔다. 그래서 나는 여성 공동체와 여성 간의 우애를 열렬히 지지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내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었을 때, 작가나 예술가 등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축복하고 지지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디올의 디자이너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마리아는 컬렉션에서 여성 예술가를 강조하는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하나다. 심지어 정기적으로 카트린 디올을 기념한다(레지스탕스 시절 카트린의 별명이던 ‘카로’라는 이름의 핸드백을 디자인한 것이 한 예다). 2022년 7월에 선보인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예술가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성들이 서로 칼을 겨눌 만큼 잔인할 때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과 여성 공동체의 힘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우리가 일생 동안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라면, 여성 공동체는 죽어서도 살 수 있는 존재다.

 

한 헝가리인 수감자가 프랑스 여성들이 어떻게 감옥에서도 세련된 외모를 지킬 수 있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마가린을 먹는 대신 얼굴에 바르는 행동을 묘사한 것을 보았다. 프랑스 여성 수감자들은 대단했다. 그들은 다른 죄수들에게 승리의 상징인 브이(V) 자를 보여주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카트린은 수용소에서도 저항군을 위해 활동했다. 비행기 모터 부품을 조립할 때 고의적으로 실수를 하는 등 저항군을 돕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건강해 보이는 것 또한 생존을 위한 방법이었다. 나치들이 약한 여성을 죽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구소련 군인들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에펠탑이 새겨진 립스틱을 발견하기도 했다. 프랑스 여성들의 시크한 본성이 어떤 악의 세력 앞에서도 숨길 수 없으며, 삶 자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꽤 많은 여성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그들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여성은 투표를 할 수 없었고, 사회적 지위는 남편이나 아버지에 기대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저항군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시작한 1944년 8월이 되어서야 인구의 1%에 불과한 4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중에서도 카트린을 필두로 폴란드 정보기관이 만든 F2 그룹은 구성원의 4분의 1이 여성이었다. 젊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젊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사람들은 때때로 부주의하지만 젊음에 걸맞은 용기를 지니고 있다. 나 또한 첫아들을 갖기 전에 <선데이 타임스>에서 사건 기자로 일했고, 매우 위험한 일을 숱하게 맡았다. 또 젊은 여성은 전쟁 초기에 의심받을 위험성이 적어 저항군에서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비밀 지령을 하담받거나 이를 전달할 때 게슈타포나 프랑스 경찰의 제지를 받을 가능성이 적었다.

저항군 소속 젊은 여성들이 자전거로 비밀 지령을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용감한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나? 내가 <선데이 타임스>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그리고 그 당시 나 또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젊은 기자로서, 또 여성으로서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었다. 특히 안네 프랑크가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고, 글로써 악에 저항하는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는 언젠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 이 여성들은 책 등으로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아픈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견뎌야 했던 잔혹한 행위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그에 대해 잊고 싶어 했다. 전쟁 중 온갖 고초를 겪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 중 일어난 일을 알리려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신의 가족 또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경험했기 때문에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찾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수년 동안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어떤 것도 읽거나 듣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내가 그곳에 가야 한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이야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를린에 가는 것조차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여정이었고, 첫날은 내내 울면서 보냈다.

나는 여전히 사랑과 여성 공동체의 힘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우리가 일생 동안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라면,
여성 공동체는 죽어서도
살 수 있는 존재다.

그때 처음으로 독일에 갔나?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로 간 거였다. 이전에 내 책이 독일에서 출판된 적이 있어 갔지만 그때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지만 체코 여성들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장미를 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사건으로 나에게 포로수용소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매애와 사랑, 단단한 힘을 상징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장미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내가 독일에 다시 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처음 갔을 때는 그곳이 악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장미 정원에 앉아 꽃을 심은 여자들의 힘을 느꼈고, 그것이 내가 불행을 똑바로 바라보고 맞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부당한 일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악이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쓰고 말하고 무언가를 창조해낼 힘을 찾아야 한다. 내 책의 주요 독자는 살아남은 다른 자매와 딸, 그리고 여자들의 손녀들이다.

당신이 책에 쓴 것처럼 당신의 정원에 장미를 심었나 그렇다. 나는 내 여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정원에서 일을 한다. 미스 디올 향수와 프랑스 여성의 이름을 딴 다른 향수에 사용하는 장미를 심었다.
카트린 디올에 얽힌 일 중에 당신에게 미스터리로 남은 것이 있나? 카트린은 생전에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프랑스의 계속되는 침묵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묻고 싶다.

크리스챤 디올이 뉴룩 컬렉션과
미스 디올 향수로 성공한 이유는
전에 없던 혁신적 면모 덕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
희망 등이 지니는 절대적인 꿈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오면서 의미를 가진다. 왜 카트린의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야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패션과 뷰티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하퍼스 바자>와 <보그>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덕분에 그것들이 주는 힘을 안다. 패션과 뷰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이해해야 글로 옮길 수 있다. 크리스챤 디올이 뉴룩 컬렉션과 미스 디올 향수로 성공한 이유는 전에 없던 혁신적 면모 덕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 희망 등이 지니는 절대적인 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이해할 수 있는 건 하이패션을 향한 사랑 덕분이기도 하지만 기자와 작가로 살아온 경험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내 첫 책은 여동생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패션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역사학자는 보통 패션에 관심이 없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통령, 장군 그리고 전쟁에 국한해 관심을 보인다. 역사와 패션은 무관하며, 패션은 피상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 중 아무도 패션 디자이너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입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나는 중요한 역사 이야기에서 패션을 배제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여성 혐오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카트린 디올에게서 영감을 받은 용기와 하이패션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다.

미스 디올 블루밍 부케 오 드 뚜왈렛. 100ml, 21만8천원. 2023년 1월, 미스 디올의 시그니처 꾸뛰르 보우로 재탄생한 플로럴 향수.

프랑스 패션 산업은 파시즘에 대한 국가적 저항의 일환으로 1944년에 살롱을 열었다 프랑스의 정체성은 하이패션이나 향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예술과 시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드레스를 보기 위해 <테아트르 드 라 모드(Théâtre de la Mode)> 전시회를 찾았다. 1945년과 1946년에 진행된 모든 전쟁 관련 소송은 생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패션 산업을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당신의 책은 유럽 역사의 거대한 부분을 요약하고 그에 따른 맥락을 짚는다. 저널리즘에 종사한 경험이 책에 스며드는 것 같다. 나는 <선데이 타임스>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있어서 인터뷰의 방식이 편해지긴 했지만,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는 때때로 독자에게 아주 끔찍한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사례를 아카이빙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 사례와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트린 디올의 정원에서 그녀가 심은 장미를 본 일은 아주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카트린과 크리스챤은 모두 유명을 달리했지만, 장미는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