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톤 원피스 쟈딕 앤 볼테르(Zadig & Voltaire), 도트 무늬 화이트 시스루 쇼트 재킷 폴 앤 앨리스(Paul & Alice).
화이트 레이스 민소매 톱, 화이트 레이스 쇼츠 모두 블랙 루즈(Black Rouge), 플라워 패턴 블랙 롱 시폰 셔츠 맥큐(McQ).
그레이 보디수트 프라다(Prada), 의자에 놓인 화이트 시폰 롱 블라우스 올세인츠 (All Saints).
화이트 민소매 시폰 블라우스 클로에(Chloe), 민소매 톱 블랙 루즈(Black Rouge).

지난달 배우 윤진서를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파리와 프라하에 머물다 막 돌아왔다는 그녀는 코끝과 이마, 볼이 동그랗고 빨갛게 타 있었다. 파리에 살고 있다는 파티시에 친구, 그 친구와 가까운 미래에 함께 열고 싶은 카페, 프라하 사람들의 우아함 등에 대해 경쾌하게 수다를 떠는 그녀는 즐겁고 또 건강해 보였다. 언젠가 그녀와 좀 더 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영화 <경주>와 <산타바바라>의 개봉을 앞둔 윤진서를 화보 촬영을 위해 다시 만나게 됐다. 이번에는 천천히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촬영 직전까지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글을 써왔고, 지난해 여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비브르 사비>라는 예쁜 책으로 엮어내기도 한 윤진서의 새로운 책이 올해도 출간될 예정이다. “글을 쓴다는 건 사실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거잖아요. 가슴에 있는 걸 머리로 끌어올리고, 그걸 다시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글을 쓰는 기간에는 하루에 7시간 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책이 나왔을 때는 정말 네가 쓴 것 맞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웃음) 블로그에 올라온 서평을 보면서 나에 대해 이런 오해가 있었구나, 오해가 풀렸구나 싶어서 만감이 교차했어요. 그래서 저에겐 큰 의미가 있는 책이에요. 이번 책은 에세이는 아니고, 단편소설이랄까? 한 여자의 기행문인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고 어떤 공간을 보고 든 생각이나 어떤 사람과의 대화를 상상하며 쓴 픽션이거든요. 오늘 오전에 출판사에 원고를 송고하고 오는 길이에요.”

윤진서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모두에게 <비브르 사비>를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윤진서라는 여자를 새롭게 알게 된 것 같다.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문장으로 쓰인 그녀의 글은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글을 통해 알게 된 자연인 윤진서는 자유롭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책에서 그녀는 촬영 스케줄이 잡히지 않는 한, 매년 여름이면 모아놓은 돈이 얼마든 몽땅 챙겨서 계절이 끝날 때까지 바다와 태양을 즐기러 떠난다고 했다. ‘그것은 내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중략) 맨발로 지구를 비비며 다닐 수 있는 자유로움은 발끝으로 모래를 밟고 서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해방감이다. 푸른 바다 앞에서는 신경질적이고, 웃음조차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마저 시름을 모두 벗어던지고 순한 강아지처럼 배를 드러내고 자연 아래 눈을 감는다.’ 이번 여름에도 해변에 누워 있을 계획이냐고 묻자, “당연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올해 여름은 캘리포니아에서 햇볕을 쬐며 보낼 예정이라고 말이다.

윤진서는 지난해에도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7월 개봉을 앞둔 조성규 감독의 새로운 영화 <산타바바라>가 캘리포니아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윤진서와 이상윤, 이솜이 출연하는 <산타바바라>는 잔잔하고 싱그러운 영화다. 매일 투닥대던 남녀의 이야기가 영화 <사이드웨이>의 촬영지이기도 한 산타바바라로 이어진다. 로맨스와 로드 무비가 합쳐진 이 영화는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진 기분으로 편안하게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장률 감독의 <경주> 역시 마찬가지다. “<경주> 시사회에 옆집 어르신을 초대했는데, 그분이 영화를 보고 나니 산속에 다녀온 기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생각지 못했던, 진짜 관객만이 할 수 있는 순수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경주>는 제가 좋아하고 친한 사람들을 막 끌어들여 판을 만들고 같이 논 영화예요. 사실 모든 영화를 촬영할 때마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닌데, <산타바바라>를 찍을 때도 잘 놀았어요. 산타바바라에서의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날, 딱 하루만 더 참으면 되는데 못 참겠는 거예요. 상윤 오빠랑 솜이랑 셋이 모여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수영장에 뛰어들어 수영하면서 너무 재미있게 놀았어요. 다음날 감독님한테 엄청 혼나고, 촬영 중간중간에 돌아가면서 몰래 토하고, 그러면서도 킥킥대고.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하길 잘했죠.(웃음) 점점 더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고, 내가 얻은 게 있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지는 것 같아요. 배우로 평생을 산다면, 그 과정을 마라톤이라고 생각한다면, 느리게 갈 때도 있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산타바바라>를 통해서는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나를 보여주려고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 뮤즈였던 배우들이 새로운 영화를 찍으면 그녀가 옷을 벗고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지, 소매치기를 하는지는 상관 없더라고요. 캐릭터보다는 그냥 그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 같아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에서 윤진서는 배우인 동시에 협력 프로듀서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그녀는 장률 감독에게 배우 박해일을 비롯해 <경주>의 주요 배역에 어울릴 배우들을 추천했고, 본인도 박해일의 옛 연인 역으로 출연했다. <경주>와 <산타바바라>를 함께한 멤버들은 같이 영화를 하건 안 하건 만나고, 다만 영화를 하면 좀 더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누가 봐도 그녀는 이제 영화계 사람이다. 윤진서의 책에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스무 살 여자애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올드 보이>의 그녀를 발견하기 전의 이야기 말이다. 꿈에 그리던 영화와 연기를 배우러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 시절 그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좁은 옷 가게였다고 한다. 월급날이면 건너편 음반 가게에서 음반을 고르고, 그 음반을 들으며 가게를 청소하면서 배우가 되기 위해 연습하는 거라고 여겼다는 그녀의 스무 살이 신선하게만 느껴진다. 이제 그녀는 누군가가 짜놓은 판에 들어가는 것을 넘어, 스스로 자신이 놀 판을 짤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해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실 그런 게 가장 부러워요. 외국에서 영화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촬영하는 날 촬영부 스태프가 조명부에 가 있기도 하고, 배우가 프로듀서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프로듀서가 배우를 하는 경우도 아주 많아요. 사실 영화 작업이라는 게 각자의 전공 분야가 있지만 서로 소통이 안 되면 하나로 모이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서로의 파트를 매워줄 수 있을 만큼 다양하게 익히고 공부하는 거죠. 웬만큼 알려진 배우들도 혼자 배낭 메고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오디션을 보기도 하고, 그런 모습이 저에게는 자극이 되더라고요.”

언젠가 매체에 공개된 윤진서의 집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성향이 또렷하게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잘생긴 진돗개가 있고, 가드닝을 즐기는 취미에 걸맞게 볕 잘 드는 옥상 온실에는 딸기며 매실, 블루베리 같은 다양한 식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좀처럼 나오기 싫을 것 같은 그 공간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이제는 가족만큼 편안해진 영화계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조금은 느긋한 삶을 즐길 만도 한데, 윤진서는 틈만 나면 깨지고 부딪혀야 하는 힘든 여행을 떠난다. 배낭을 메고 걸어 다니다가 유스호스텔에서 잠드는, 일반 사람들도 스무 살에나 시도하는 여행 말이다. 그녀는 현실 속에서 무감각해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극을 주는 것은 돈이나 인기, 사람들의 평가가 아닌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매력적인 사람을 많이 만나게 돼요. 그런 친구들이 생기는 게 너무 기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같은 느낌도 들어요. 유스호스텔 같은 곳에서 자면 자연스레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게 되잖아요. 각자의 나라 상황에 대해 토론하듯이 열띤 대화를 나누는 게 재밌고, 아직도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많구나 싶고, 더 많이 알고 싶어져요. 그럴 때 내가 살아서 숨 쉬고 있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 쾌락에 자꾸 빠지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여행을 가서 글을 쓰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여행을 할 때의 나는 더없이 자유롭고 평소와 다른 사람 같은데, 그런 나를 삶으로 끌고 들어오고 싶어서요. 그곳에서 뭔가 나의 일을 해야 일상이 될 것 같아서 글을 더 열심히 쓰게 된 것 같아요. 두 번째 책이 나오고, 세 번째 책이 나오면 여행지에서의 나와 현실의 내가 점점 더 가까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찰스 부코스키가 <여자들>이라는 소설에서 작가는 그냥 계속 쓰는 거라고, 쓰지 않을 때는 내 안의 작가가 죽었거나 내가 죽었을 때라는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저한테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기에는 어색하지만 그냥 나의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브와르 비브르(savoir-vivre)’, ‘삶을 알다’라는 뜻의 글귀는 잊지 않기 위해 발목에도 새겨놓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이 자연스레 쌓여 미래에 윤진서라는 배우를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임은 분명하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흰머리를 가지게 되도 정신은 늙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유럽 어딘가의 호스텔이든, 파리에 차리고 싶다는 그녀의 가게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해변이든, 영화 밖의 윤진서를 우연히 만나면 또다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게 될 것 같다. 그녀는 누구와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