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희는 둥글게 말한다. 어느 하나에 섣불리 치우치지 않는 답변에 성실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천우희만의 신중한 시선이 조금씩 엿보인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거든요.” 천우희는 그런 자신을 ‘기호가 불분명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천우희가 저마다 가진 아름다운 면을 보는 사람,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온 삶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어느 날>의 영혼 ‘미소’ 다음으로 천우희가 선택한 역할은 tvN 드라마 <아르곤>의 비정규직 기자 ‘이연화’다. 자신의 말마따나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역할들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 필모그래피를 돌이켜보면 꽤 흥미로운 행보다. “언제나 나 스스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해왔지만 일상의 소소한 감정을 보여주는 연기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어요.” 방송국 탐사보도팀의 비정규직 기자가 되기 위해 천우희는 언론 고시 준비서를 정독하고 방송국별 발성법까지 익혔다. 쉽지 않은 일인데도 천우희는 내내 가느다랗고 섬세한 목소리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입가에 옴폭 파인 보조개를 드러내며 싱긋 웃는 천우희가 벌써 연화로 보였다.
정통 드라마에 출연하는 건 처음이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영화로 시작하기도 했고 영화계에서 많이 찾아주셔서 저 또한 영화가 익숙하긴 한데, 이번에는 새롭게 도전하고 영역도 넓히고 싶었어요.
대본이 흥미로워야 작품을 선택한다고 했어요. <아르곤>은 어떤 점이 끌렸어요? 지금까지 영화에서 제가 맡은 역할이 다 현실과 조금 동떨어진 인물들이었어요. <아르곤>은 드라마라서 그런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제가 맡은 연화는 비정규직 기자예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연화가 그 나이에 겪는 일들이 공감이 많이 돼서 선택했어요.
일상생활 연기에 대한 갈증이 좀 있었나요? 지금까지 선택한 작품이 물론 다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소소한 이야기, 일반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연화는 탐사보도팀 기자라는 전문직 여성이죠. 연기를 하기 전에 그 분야를 따로 배우거나 공부했나요? 제가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요. 하다못해 어떻게 기자가 되는지조차 몰랐죠. 그래서 기자들이 쓴 책도 읽고 앵커분을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기본적인 생활이나 평소에 갖고 다니는 물건 같은 것들. 방송사마다 다른 발성도 배웠고요.
취재팀 중에서도 탐사보도팀은 업무 환경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죠. 그런 환경에서 ‘이연화’는 유일한 여성 기자이고 계약직이에요. 우리 사회의 약자를 대변하는 캐릭터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에나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죠. 이 나이엔 다들 힘들잖아요, 모든 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시간은 많은 데 돈은 없고,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싶은데 경력이 적으니 잡일만 하고. 그런 부분을 많은 분이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겪었기 때문에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물론 뉴스룸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있겠지만 이연화라는 친구가 역경에 부딪히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 완성되지 않은 ‘미생’이지만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제 목표예요.
그 부분이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겠네요. 천우희가 실제로 기자였다면 어떤 부서로 가길 원했을까요? 그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처음엔 그럴 수 없더라고요.(웃음) 저야 문화부에 가고 싶겠지만 가서 일하라면 어디서든 열심히 해야죠.
지금까지 함께 연기한 상대 배우 모두 각자 다른 매력이 있었을 거예요. 김주혁은 상대 배우로서 어떤 매력이 기대되나요? 특이하게도 김주혁 선배님은 같이 호흡을 맞춰본 적은 없는데 같은 작품을 꽤 했어요. 곧 개봉할 <흥부>라는 작품에도 저랑 마주치는 부분은 거의 없지만 같이 출연하고 <뷰티 인사이드>에서도 함께 출연했죠. 선배님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무척 일상적이면서도 편안한 매력이 돋보여요. 함께 연기 호흡할 때도 그 부분이 매력적으로, 편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돼요.
어떻게 보면 <아르곤>은 신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천우희가 가진 직업적 신념은 무언가요? 뭐든지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물론 부수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진심으로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에 몰입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요? 자학하죠, 하하하. 몰입이 안 될 때도 있어요. 제 문제일 수도 있고 상황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몰입을 포기하는 순간 모든 걸 포기하게 되는 거니까 끝까지 포기 안 하고 어떻게든 해내는데 집에 가서 자학해요. 왜 몰입이 안 됐지? 뭐가 문제였지?
자신에게 좀 엄격한 편인가요? 그 덕분인지 앞으로 행보가 유난히 궁금한 배우이기도 해요. 이제는 시나리오만 봐도 ‘이건 내가 잘하겠다’ 싶은 역할 이 눈에 보일 텐데, 자신이 잘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어렵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역할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그 이유가 있다면요? 잘하겠다 싶은 건 아직도 모르겠고 일단 제가 뭘 끝까지 하지를 못해요. 집중력이 좀 약한 걸 수도 있는데, 또 어떤 걸 파다 보면 엄청난 집중력을 보일 때도 있거든요.
보통 어떨 때 그 집중력이 나오나요? 그러니까, 단순하게 그냥 제 마음인 거죠, 하하. 그냥 내 마음! 흥미를 느끼는 때가 천차만별이라서 어떻게 보면 변덕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저만의 취향일 수도 있는데 작품을 볼 때도 그래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읽히는 작품이 가장 재미있게 느껴지고, 그래야 관객 또한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맥락이 다 같은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흥미를 느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렇게 연기할 때 이런 재미가 있겠지?’ 상상할 때도 참 재밌거든요. 그런 흥미를 느낄 만한 시나리오가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가 부각되는 배우들은 인간적인 면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요. 사적으로 천우희는 어떤 사람인가요? 되게 평범하고요, 하하. 무척 진지할 때도 있지만 한없이 가벼울 때도 있고. 사람마다 가진 성향을 다 갖고 있어요. B급 코미디, ‘병맛’ 코드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그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고 한 부분 이에요. 특정한 요소요소마다 재미를 찾는 것 같아요.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외향적인 사람이에요? 가깝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땐 낯을 가리는데 사적으로 친분이 있다 싶으면 저를 잘 보여주기도 하고,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해요.
술이랑 커피 중에 어떤 게 더 좋아요? 커피는 안 마시고 술은 마실 줄 알아요.
전부 둥글게 말하네요, 둥글둥글. 하하하. 제가 생각보다 기호가 분명하지가 않아요. 성격적으로 호불호가 있기는 한데 기호가. 왜, 가끔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있잖아요. 얼굴 생김새를 가지고도 충분히 호불호를 가릴 수 있는 건데, 저는 이 배우는 이래서 좋고, 저 배우는 저래서 좋거든요.
마침 제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질문이 그거예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과 그의 작품. 그러니까요!(웃음) 그런 것도 없어요. 특히 누가 롤모델이 있느냐고 물으면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곤란해요. 어떤 분은 특정 배우를 보고 나도 저렇게 돼야지 하는 생각에 배우를 하려고 마음먹었다는데, 저는 그냥 연기 자체에 재미를 느껴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그 질문을 받으니까 드니 빌뇌브가 생각나요. 처음부터 그 감독을 좋아한 게 아니라 여러 작품을 봤는데 좋아서 감독을 찾아봤더니 다 같은 분의 작품이더라고요. 제가 그런 걸 좋아하나 봐요. 진공상태 안에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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