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위스키와 담배만을 사랑하는 ‘미소’는 담뱃값이 2천원 오르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가사도우미로 살아간다. 이 매력적인 한 줄의 시놉시스만으로 좋은 소문이 난 영화 <소공녀>는 그간 상영할 때마다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3월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다소 판타지적인 미소라는 캐릭터와 그를 둘러싼 이 사회의 현실적인 단면은 좋은 균형을 이루며 깊은 공감을 자아내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즈음 관객은 어딘가에서 사랑하는 작은 것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 미소를 향해 빙긋이 웃음 짓게 된다. 미소로 분한 이솜과 감독 전고운은 ‘위로’처럼 거창한 단어를 쓰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꼭 미소처럼 말했다.
이솜
영화에서 이솜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인가? 볼 때마다 다른데 마지막에 미소의 모습이 언뜻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면 내 캐릭터지만 그립다, 미소가.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촬영하는 내내 혼자 다녔다고 들었다. 현장에 혼자 다녀보고 혼자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을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회사나 매니저에게 너무 익숙해지는 것 같아서. 그러기에 딱 좋은 작품이 <소공녀>였다. 쉽진 않았다. 스태프들과 가까워지면서 현장 분위기를 너무 잘 알게 된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했다. 캐릭터나 장면에만 몰입해 있어야 할 때에도 그 외의 것들이 보이니까. 하지만 추운 날씨에 대기할 장소가 없어서 스태프들과 같이 대기하기도 하고 내 차에 스태프들을 태워서 현장을 이동하거나 장비를 옮겨주거나 하는 것들이 재미있었다.(웃음) 옷도 캐릭터 의상을 입고 퇴근해서 그대로 입고 출근했다. 혼자 다닐 만하던데?
전고운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함께 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봤다. 무엇이 와닿았나? 일단은 그 전에 <소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전작인 <범죄의 여왕>이 끝날 때 나오는 쿠키 영상을 보기도 했다. ‘위스키와 담배를 좋아하는 30대 여자’라는 캐릭터 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흥미로웠다. 누가 할지 궁금했는데 시나리오가 내게 들어왔다. 일단 ‘광화문 시네마’라는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보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미소는 굉장히 드문, 좋은 캐릭터다. 보통은 술, 담배를 하는 캐릭터가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내겐 그런 것들이 유니크하게 다가왔고 감독님의 스타일을 아니까 머릿속에 떠올린 것들이 좋은 작용을 한 것 같다.
전고운 감독의 연출은 어떤 방식인가? 워낙 짜인 대로 하는 것을 안 좋아하셔서 배우들의 이야기를 잘 받아들여 주셨고 그런 면에서 서로 호흡이 좋았다. 등장하는 캐릭터가 많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대본에 있는 대로 하되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으면 감독님에게 의견을 냈고 그렇게 자연스러워지도록 감독님이 많이 유도했다. 그 덕분에 캐릭터들의 사이가 더 끈끈해졌다.
배우 이솜의 필모그래피에 오랫동안 기억될 이름이 아닐까 싶다. 미소를 연기하는 동안 미소가 이솜의 인생에 끼친 영향이 있나? 당시에는 미소와 아주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미소를 알고나서는 좀 더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의 이솜은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느니 집을 포기하겠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나? 사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집이 너무 좋거든.(웃음) 그런데 생각을 해봤다. 정말 오로지 자기 인생을 위해서라면 집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소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삶을 꾸리려 노력한다. 미소처럼 단출하게 살 수 있다면 이솜의 삶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질까? 어렵다. 나도 미소처럼 민폐 끼치는 걸 꺼리고 친구들을 정말 좋아한다. 친구들이 재워달라고 하면 미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재워줄 수 있다. 내 삶은 맛있는 음식, 산책, 영화, 모닝커피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안재홍과의 호흡은 어땠나? 재홍 오빠는 정말 같이 하고 싶은 상대 배우 일 순위였다. 잘 몰랐을 때 시상식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재밌고 인간적이어서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연기할 때도 역시 그랬다. 무엇보다 ‘광화문 시네마’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제작사와의 의리를 지키는 모습과 정말 좋아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것이 매우 고마웠다. 상대 배우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난히 몸을 많이 쓴 촬영이 아닌가 싶다. 큰 짐을 들고 다니며 가사도우미의 일을 하고 추위에 떨어야 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체력이 좋아서 그런 것은 괜찮았는데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이 힘들었다. 거의 한 신에 반 갑 이상은 피웠으니까. 게다가 담배는 미소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여서 감독님이 맛있게 피워야 한다고 집요하게 요구하셨다. 어지러워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고, 안 그래도 짐이 많은데 의상을 잔뜩 겹쳐 입어야 하는 것이 버겁기도 했다. 촬영 당시 내 별명이 덩치 큰 해그리드였다. 하하.
그래도 좋은 기억이 많이 남은 현장이었을 것 같다. 애정이 정말 큰 작품이었다. 현장에서 매 회차 폴라로이드를 직접 찍었는데 현장 스틸 기사님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열정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년에 그 사진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었다.
그런 열정이 모여 만든 <소공녀>를 어떤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나? 작은 것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싶은 분들. 특히 청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을 것이다.
전고운 감독
<소공녀>가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다녀왔단 소식을 들었다. 분위기가 어땠나? 해외 영화제는 처음 가봤는데 규모가 크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부산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동네의 작고 귀여운 극장에서 진행됐는데 관객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놀랐다. 극장이 1백 년이나 된 건물이라 극장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 극장에서 상영하기가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운이 좋았다. 나는 내 영화를 보는 것을 진짜 싫어하는데 외국인들 반응이 궁금해서 같이 봤다. 잘 웃고 재미있게 보셔서 신기했다. ‘한국 문화 코드 때문에 웃긴 게 많은데 왜 웃지? 이렇게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웃음)’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다.
미소를 보면서 <바그다드 카페>의 ‘야스민’이 떠올랐다. 자신의 상황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따듯한 사람. 서울이 워낙 과열된 도시니까 ‘미소’ 같은 인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착한 사람. 내가 생각하는 착함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선 사람이 멋이 있어야 호감이 가니까 멋에 대해 생각했고, 멋이 있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 만들다 보니 미소가 나왔다. 필요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이솜을 미소로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저예산 영화라 배우에게 페이를 충분히 줄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솜이 씨에게 내가 얻을 것은 분명히 있었다. 인지도가 적당하고 모델 출신이라 예쁘기도 한데 연기는 아직 안 보여준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을 <소공녀>에서 보여준다면 서로 좋은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솜이 씨를 두고 외모와 내면 그리고 내가 실질적으로 줄 수 있는 것까지 아주 다양하게 생각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미소가 30대 중·후반이었다고 들었다. 성인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좋고 재미있는 영화. 그래서 주름이 잘 보이고 노화가 보이는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아마 그랬다면 영화의 느낌이 아예 달랐을 것이고 지금만큼의 호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쉽지가 않더라.
의도와는 달랐더라도 완벽히 다른 매력을 가진 미소가 나왔다. 그래서 아쉽지 않다. 영화라는 작업이 정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솜 배우를 포함해 의상 등 모든 스태프가 그렇게 미소를 만드는 데 더 좋거나 덜 좋은 문제를 떠나 캐릭터가 처음과는 다르게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좋았다.
미소는 왜 하필 위스키를 좋아할까? 제일 가까운 이유는 내가 위스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른 술은 못 마신다. 몸에서 안 받거든. 외적인 의미를 만들자면 사치스러운 양주의 이미지를 가져가고 싶었다. 기술적인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을 보면 전쟁이 났을 때 결국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게 술과 담배라는 게 인상 깊게 남았다. 인간에게 술, 담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다. 어딘가에 중독되어 사는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굉장히 현실적인 영화다. 광화문 시네마 특유의 과장된 느낌이 빠져 있는 것도 좋았다. 낭만적인 캐릭터와 현실의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지나치게 궁색해 보이지 않도록. 그 고민이 가장 컸다. 미소는 결국 솜이 씨가 하는 역할이니 솜이 씨에게 매달렸던 것 같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둘이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고 대화도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다행히 성향이 잘 맞았다. 갑자기 친해진 친구처럼. 그런 친구 믿으면 안 되는데.(웃음) 현장에서는 배우들이 머리로 분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경직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솜이 씨와 시간을 많이 보냈기 때문에 미소가 판타지적인 캐릭터인데도 사람 같아 보인 것 같다. 솜이 씨가 다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상황이 짠하다고 느껴질 때의 필연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구성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배우들의 힘이기도 하다. 웃기게 해석될 여지도 있는 장면에서도 관객 대부분이 우는 걸 봤다. 연출 의도와 달랐는데 오히려 더 좋게 나온 부분이 있었나? 솔직히 내 의도보다 모든 게 못하다. 영화 가편집본을 보고 정말 우울했다. 누구나 이상형이 있지 않나. 나는 미카엘 하네케를 생각했다.(웃음) 그렇게 연출력이 위대한 감독들의 작품을 보다가 내 첫 작품을 보니 얼마나 가소롭던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왜 좀 더 가지 않았을까 자책했다.
그렇게 느끼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거다. 내가 느껴야 한다. ‘와, 정말 신선하다, 이 영화!’ 사실 내가 모든 면에서 만족의 기준이 높은 편이긴 한데 다행인 건 이 영화가 꼴 보기 싫지는 않다는 점이다. ‘좀 아쉽지만 그래도 귀여워’ 이런 느낌이다. 이게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칭찬이다.
늘 직접적인 이유와 해명이 필요한 이 사회에서 미소 같은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대놓고 위로를 하려는 영화가 아닌데도. 내가 항상 위로를 느낄 때는 영화든 사람이든 공감을 될 때였던 것 같다. 아무도 안 만들어줄 것 같았던 이야기를 만들어주면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됐다. <소공녀>도 만들면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일으켜 작은 위로를 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몇 명에게라도 전달이 되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나? 사실 내 친구들 보라고 만들었다. 친구들이 다 미소처럼 가난하기 때문에 ‘야, 우리 그냥 살자!’라는 의미로 만들었다. 내 친구들 같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을까?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